선고

그날 나는 죽었다.

by 김선비

친구가 상대방이 내 카톡 아이디를 차단했는지 확인하는 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카톡 채팅방 목록을 뒤져보면 가끔 나만 남아있는 단톡방이 있다. 모임 후에 비용 정산을 하고 모두 나가버린 방일 수도 있고 조별 과제를 하려고 임시로 만들었던 단톡방일 수도 있다. 누구나 카톡 목록을 뒤져보면 제일 아래에 그런 방이 하나쯤 있다. 그런 방에 상대방을 초대해보라. 만약 그가 나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김현민님이 ㅇㅇㅇ님을 초대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고, 차단했다면 뜨지 않을 것이다.


알려준 대로 해봤다. 일단 나를 차단하지 않은 게 확실한 사람 몇 명을 초대해봤다. 초대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이번에는 그 사람을 해봤다.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 차단당한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산 사람은 죽음을 겪어볼 수 없고,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와서 죽음이 뭔지 말해줄 수가 없다. 하지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들의 세상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세상을 호령하던 권력자라도, 대기업의 총수라도, 사람들의 환호와 사랑을 독차지하던 대스타라도 죽고 나면 다 똑같다. 산소 분자 하나를 들이마셔서 이산화탄소 분자로 바꿔놓는 일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고 나서도 자기가 살아 생전에 누리던 화려한 삶을 이어나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의 왕들은 자기 몸을 방부처리해서 미이라로 만들었고, 진나라의 시황제는 불로장생의 약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죽음을 극복해내지는 못했다.



아무도 없는 채팅방에 너를 초대했을 때, 그리고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는 걸 봤을 때 내가 느낀 건 그것이었다. 만약 내가 500년 전 어느 농부의 아들 김갑돌이었다면, 네가 이웃 마을에 사는 어느 대장장이의 딸 이을순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네가 날 보고 싶어 하지도, 내 소식을 궁금해하지도 않을지라도 어떻게든 나와의 접점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를 낳았는지, 과거에 급제했는지, 아니면 전쟁터에 끌려가서 화살 맞고 죽었는지, 그런 소식들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작은 감정의 동요라도 느꼈을 것이다. 슬퍼하거나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하고 콧방귀라도 뀌었을 것이다. 좋건 싫건 너라는 영화 속에 나는 아주 사소한 배역의 단역배우로나마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없다. 너와 나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기도 아니고, 직장 동료도 아니다. 이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우연에 기댈 순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마주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드넓은 서울 시내에서 너와 내가 영화처럼 마주칠 확률은 영화 아마겟돈에서처럼 운석이 지구에 충돌해서 지구가 멸망할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애초에 너와 나의 접점은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작은 기계장치 밖에 없었다. 이 기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너를 만날 수 있는 방법도, 너의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늘 그랬다. 겨우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관계였다. 그러니까 내가 너의 삶에 더 등장하지 않길 원한다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그 유일한 접점을 없애면 된다. 내 프로필을 2초 정도 꾹 누르고, 숨김과 차단이라는 팝업 메뉴 중에 차단을 선택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너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사람, 너라는 소설 속에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죽은 사람이 된다. 그게 그렇게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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