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

집착남의 기억법

by 김선비

너에 대한 책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별건 아니다. 손바닥 하나 넓이의 얇은 책이고, A4로 15장 정도 된다. 대학교 기말 보고서 하나 정도 분량이다. 팔려고 만든 건 아니다. 누구 보여주려고 만든 것도 아니다.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만든 것도 당연히 아니다. 그냥 워드로 쳐서 인쇄소에 맡겼더니 다음날 뚝딱 만들어줬다. 딱 한 부. 3천 원인가 들었다.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너는 나를 죽였다. 010-xxxx-xxxx. 너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이었던 11자리 숫자를 지웠다. 너는 나를 없는 사람으로 치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섹스 못했으니 사귄 거 아니지 않냐고, 짧게 만났는데 그리워할 거나 있냐고, 나 혼자 사귀었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모두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기억해야 했다. 네가 나를 죽였다고 나까지 너를 죽일 수는 없었다. 너라는 세상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나라는 세상에서 너는 존재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적어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혔다. 잇몸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눈은 앞을 보는 기관이고, 입은 말을 하는 기관이고, 귀는 소리를 듣는 기관이다. 하지만 잇몸은 딱히 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양치질을 하다가 칫솔 머리로 잇몸을 찔러서 상처가 났을 때, 아니면 피곤해서 입이 헐었을 때 잇몸은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된다. 온몸의 신경이 잇몸에 집중된다. 상처가 난 부위를 자꾸만 혀로 핥고, 손으로 건드리면서 그 따끔한 통증을 음미한다.


너를 기억하는 방식도 그랬다. 내 기억 속에서 나는 한심하고 무능한 남자로 기억되었고, 너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은 모두 후회로 남았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만큼 너는 선명해졌다.


하지만 이건 이미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무뎌지게 하기에. 너에 대한 기억들도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릴 것이기에.


머릿속 선명한 네 번호, 습관처럼 변한 말투들, 너무 따뜻했던 네 온기, 그리운 모든 것들이 잊혀진다는 거. 그게 아파.
- 노을, [잊혀진다는 거]

그게 문제였다. 내 기억 속에 너는 후회와 자괴감으로 남았다. 왜 그렇게 혼자 들떴었는지. 왜 나 혼자만의 감정과 생각들을 강요했던 건지. 왜 조금 더 침착하게,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못했는지.


그 부정적인 감정들은 내 삶을 갉아먹을 것이다. 나를 더 어둡고 무거운 사람으로 만들 것이고, 그런 모습들로 인해 다가올 인연들도 나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 어둡고 무거운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너도 날 버렸던 거겠지.’ 하면서 더 깊은 자괴감과 후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잊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한 건가. 너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지도 못했고, 아예 깔끔하게 잊고 다른 사람과 새 출발을 하지도 못했다면, 인생에 한 번뿐인 젊은 날을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서 보내고 무엇하나 얻은 게 없다면 나는 그 동안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때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박제를 시키는 것이다. 자기 몸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삶을 누리려 했던 이집트 왕들처럼, 냉동처리된 채 우주선에 실려서 수천 수만 광년 떨어진 외계 행성으로 떠났던 어느 SF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내가 너를 잊더라도 나 대신 너를 기억해줄 일종의 백업 폴더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당연히 그 글은 너에게 닿지 못했다. 지금도 내 방 책상 서랍 구석탱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 지금은 낯부끄러워 꺼내 읽어보지도 못하는 글이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나도 너를 잊었지만, 나에게 너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지만 내 책상 서랍 한구석에는 여전히 너의 기억을 저장해놓은 백업 폴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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