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져가기를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 아무리 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서 너를 기억하려 애쓴다고 해도, 글로 써서 박제해둔다고 해도, 그건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짝사랑했던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의 결말은 이렇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녀와 나는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생겼다. 같은 중학교를 나왔고, 나도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셋이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당시 그녀와 나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던 친구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 친구가 보기에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퍽이나 별로였나 보다. 둘은 언쟁을 벌였고, 불똥은 나에게 튀어버렸다. 마치 내가 메신저 친구에게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라고 사주한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내게 화를 냈고, 이후로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녀는 꽤나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남자 친구가 있어서, 나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녀를 찾아가지 못하지만 언젠가 졸업하고 나면, 어른이 되고 나면 꼭 그녀를 다시 찾아야지, 했다. 그리고 그때 일은 오해였다고 말해줘야지,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녀를 처음 보고 사랑하게 되었듯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날까지 이 마음 변치 않겠다고, 그녀 앞에 부끄럽지 않은 멋진 남자가 되어있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나는 그 소녀를 굳이 찾지 않을 것이다. 설령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모른 척 지나칠 것이다. 설령 그 소녀가 먼저 날 알아본다 해도 그뿐일 것이다. 지난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 소녀를 잊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녀를 좋아했던 내 감정을 잊었다. 그 소녀의 얼굴, 내게 했던 말, 시시콜콜한 사건들 하나 하나 모두 기억하지만 딱 하나, 그때의 감정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도 그럴 것이다. 나는 너의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너의 얼굴, 너의 목소리, 자주 쓰던 이모티콘, MBTI, 가족 관계, 네가 했던 사소한 말들과 행동들, 무엇 하나 잊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혹시나 몰라서 글로 박제해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딱 하나, 너에 대한 마음을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 15살 때 짝사랑했던 소녀가 그랬듯 너에 대한 감정들 역시 새로운 기억들에 묻혀 희미해질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굳이 널 찾지 않을 거고, 혹시 마주치더라도 그냥 지나칠 것이다. 이제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너를 만났을 때 하려 했던 말들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지금도 읊으려면 그대로 읊을 수 있지만 그 말을 해야 할 이유, 즉 그때의 감정을 기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이라는 영화를 봤다. 대학생 윤석영(이병헌)이 농활을 가서 시골처녀 서정인(수애)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정인의 아버지는 '빨갱이'였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인은 석영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석영을 떠난다. 석영은 오랫동안 정인을 그리워한다. 결국 영화의 말미에 60살 노교수가 된 석영이 정인을 찾는다. 정인은 이미 죽었다. 그러나 정인은 석영에게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편지로 남겼고,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은 이어진다.
석영은 어떻게 60살 노교수가 될 때까지 정인에 대한 마음을 간직했을까. 농활 가서 정인을 만난 것이 1969년이고 영화의 배경은 2006년이다. 40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석영은 많은 여자들을 만났을 것이다. 얼굴이 이병헌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오랜 시간, 그 많은 인연들에 의해 정인에 대한 감정은 석영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씻겨내려갔을 것이다. 정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그 감정 자체를 간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설령 자발적인 금욕 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 마음을 간직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관념이 남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정인을 향한 석영의 마음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져가기를
- Never ending story, 부활
어쩌면 정말 영화와 같은 일은, 너와 내가 언젠가 마주치게 되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