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사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

by 김선비

네이버 카페에서 알게 된 어느 책 동호회에 나간 적이 있다. 남자는 나 한 명에 여자는 두 명이 있었는데 둘 중 한 사람(이하 A)이 자기가 사주를 볼 줄 안다고 했다. 나머지 한 명의 여자(이하 B)와 나는 흥미로워했고, A는 그 자리에서 B와 나의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수 목 토의 기운이 발달한 반면 화 금의 기운이 부족하다고 했다. 토양(土)도 좋고, 물(水)도 맑아 나무(木)가 잘 자라지만, 노력과 재능에 비해 결실을 맺지는 못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냥 재밌는 이야기 정도로 넘기고 헤어지려 하는데 A가 자기를 따라가서 정성을 드리면 운이 트이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됐다고,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서 조금은 꺼림칙하다고 했다. 그런데 B가 자기는 너무 궁금하다고, 꼭 가서 정성을 드려보고 싶다고 했다.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다.


덜컥 겁이 났다. A와 B는 오늘 처음 만나서 통성명을 했다. 원래 알던 사이가 아니다. 그러니 B가 직접 가서 정성을 드려보고 싶다고 한 게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A와 B는 원래 한통속이었고, 둘이서 짜고 나에게 공사를 치고 있는 거라면?


조금 겁이 나서 망설이고 있는데 A가 대로변에 있는 곳이니까 별일은 없을 거라고, 정 찝찝하면 무리하진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별일 없겠지, 하고 A와 B를 따라가게 되었다.



도착한 곳은 영등포 구청 앞에 있는 어느 건물 2층이었다. 내부는 가정집처럼 되어 있었다. 작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B와 나에게 A가 개량 한복 한 벌씩을 주며 이걸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옷을 갈아입은 B와 나는 제사를 드리는 방으로 갔다.


방에는 A와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운이 트이게 하려면 조상들께 정성을 표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며 얼마나 내야 하냐고 물었고, 남자는 액수는 중요치 않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만 원만 내도 되냐고 하자 그렇게 하라고 했다.


A와 남자는 나와 B가 낸 지폐에 불을 붙였고, 우리에게 그 돈이 불타는 동안 소원을 빌라고 했다. 그리고 뜻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그들이 주문을 외우는 동안 나와 B는 절을 했다.


제사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남자가 B와 나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정성을 드리는 건 돈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조상들께 정성을 제대로 표하고 싶으면 삼칠일, 즉 3주 동안 이곳에 나와서 자기와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B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녀는 3주 동안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남자가 특별히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아서 그냥 속는 셈치고 나가보기로 했다.


강의 내용은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고, 그 세상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우주는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로 넘어가고 있고, 가을에는 큰 변혁이 올 거라고 했다. 그리고 2000년 전 예수가 원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했듯, 다가올 우주의 가을에는 한국에서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날 거라고 했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일합방이 부패한 조선 왕조를 몰락하게 하기 위한 천주님의 큰 그림이었다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났고, 나는 이제 다 된 거냐고, 이제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냐고 물었다. 남자는 아직 해야 할 게 있다고 했다. 자기들은 대순진리회이며, 회원 가입을 해서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을 나왔다.



이 얘기를 왜 하냐고? 내가 그곳에 간 이유가 너였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여자 둘을 따라서 영등포 구청 앞 허름한 건물에 들어갔을 때, 개량 한복을 입고 뜻 모를 주문을 외우면서 만 원 짜리를 불태웠을 때, 3주 동안 천주님과 메시아에 대한 강의를 들었을 때. 내가 빌었던 소원은 우스꽝스럽게도 너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3주 뒤 마지막 강의를 듣고 그 건물을 나왔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더운 여름날 3주 동안이나 시간을 낭비하면서 인생에 별 도움도 안 될 것 같은 미신 같은 강의를 들었는데, 그 바보짓을 해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소원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슬프지도 않았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때 알았다. 사실 나는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 잊고 다른 여자를 만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너를 잊고 새출발한다면 너에 대한 내 마음이 그만큼 가벼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겐 핑계가 필요했다.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이만큼 했으면 그냥 잊어도 되겠다고 할만한 변명 거리가 필요했다. 그게 대순진리회에서의 3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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