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갖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 마이클 타이슨
다 계획이 있었다. 커플이 될 계획은 아니다. 어차피 난 안 될 거다. 살아봐서 안다. 내 인생에 여자한테 인기가 많고 핫했던 시기는 없었다. 나는 항상 구석탱이에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내 마음을 받아줄지 말지는 상대방이 정하는 거지만 마음을 전할지 말지는 내가 정할 수 있다. 똑같이 거절당하는 결말이더라도 4박 5일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해보고 올지, 상처받고 거절당하고 망신당하는 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죽이다 올지는 내 선택이다.
더도 덜도 말고 그렇게만 해보고 싶었다. 나는 늘 사랑을 원했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걸 걸어보지는 못했다. 겁나서 그랬다. 나는 (촬영 당시) 33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 관심있는 여자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떻게 마음을 표현하고 스킨십을 리드해야 하는지, 뭘 사줘야 여자들이 좋아하는지 하는, 이십대들도 알법한 것들도 잘 모른다. 회사로 치면 나이는 과장급인데 경력은 신입인 셈이다. 그러니까 아마 나를 뽑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이십대처럼 풋풋하지도 않고, 삼십대처럼 농익지도 않은 나 같은 남자에게 끌릴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게 낫다. 괜히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
이런 자신의 비겁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저런 개똥철학들을 만들어냈다. 어차피 진심보다 중요한 건 겉모습이다, 그러니까 허세를 부려야 한다, 진실된 사랑이란 없다, 그저 서로의 이기심이 있을 뿐이다, 동물의 왕국이 그렇듯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도 더 매력적인 강자에게 덜 매력적인 약자가 희생당하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굴러갈 뿐이다, 하는 그럴싸한 말들을 해대며 짐짓 쿨한 척했다.
하지만 모두를 속여도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돈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개 돈에 미친 사람이듯, 사랑의 가치를 폄하했던 나는 사실 사랑을 누구보다 갈구해온 사람이었다. 그냥 사랑을 위해 무언가를 걸고, 노력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게 두려워서 관심 없는 척한 것이었을 뿐이다. 냉소적인 말들로 세운 견고한 성벽 속에 숨어 혼자 도도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말들은 나를 지켜주는 성벽이 아니라 나를 가둔 감옥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벽을 넘어보고 싶었다. 망신당해도 좋고 상처받아도 좋으니까 단 한 번이라도 내 마음에 솔직해보고 싶었다. 사랑만을 위해 만들어진, 사랑이 아니면 할 수도 없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이곳에서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단 첫인상 0표를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나 말고도 0표를 받은 남자가 세 명이나 더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0표인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정신적 타격이 크지는 않았다. 첫인상에서는 외모가 훤칠하고 스타일이 좋은 영식(당시 34세, 초등교사)이 몰표를 받았지만 다음 날 자기소개를 하고 내가 가진 장점들을 충분히 보여주면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소개에서도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섬세, 순수, 성실한 트리플 S의 남자라는 키워드로 열심히 멘트도 짜고, 장기자랑도 준비했지만 막상 하고 나니 다들 시큰둥했다. 질문들도 정말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라기보다 그냥 방송 분량을 위한 질문들처럼 보였고(물론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따로 대화를 하자는 사람도 없었다. 순자(당시 28세, SRT 승무원)를 따로 불러서 대화를 해보았지만 그녀는 결혼은 부산 사람과 하고 싶다는 말로 완곡한 거절 의사를 표했고, 첫인상에서 선택했던 정자(당시 28세, 치위생사)에게는 이미 영식, 정식, 영철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한 나의 경쟁력은 그중에서 꼴찌였다. 영철조차 이길 자신이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순간 멘탈이 나갔다. 나는 잘생기지 않았다. 돈이 많지도 않고, 여자를 꼬시는 필살의 스킬 같은 걸 갖고 있지도 않다. 당연히 인기도 없다. 하지만 제작진은 수많은 지원자들 중 나를 뽑았다. 원래는 3기에 나갈 예정이었다가 개인 사정으로 연기했는데도 4기 촬영까지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날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이 프로그램에 출연시키려 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 프로그램에 밥줄이 걸려 있는 그들이 내게 기회를 줬다는 건 내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자왕이 되고 최종 선택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과 가치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게 촬영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전쟁 영화나 사극 드라마에는 전장을 호령하는 용맹한 장군, 신출귀몰한 책략을 짜는 참모도 나오지만 빗발처럼 몰아치는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 같은 몰골로 죽어가는 병사 1도 나온다. 연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려한 말빨과 훤칠한 기럭지, 당당한 태도로 여심을 휘어잡는 알파 메일들도 있지만 그런 알파 메일들에게 밀려서 기회도 얻지 못하는 찐따남들(사실 밀렸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설령 그 알파 메일이 없었더라도 그들은 여자에게 선택받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도 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둘 중 어느 쪽일까? 제작진은 여성 시청자들을 설레게 해주려고 나를 캐스팅했을까? 아니면 세상에 이렇게 찌질한 남자도 있다고 동네방네 조리돌림을 하려고 캐스팅했을까?
그리고 제작진의 메가폰이 울렸다. 첫 데이트 선택. 여자가 데이트 신청을 하고, 남자가 선택을 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원래 생각했던 것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버려야지, 버려야지 수십 번 되뇌었던 비겁한 생각들이 다시 스멀스멀 밀려왔다. 지금 정자에게 세 명의 남자가 몰렸다. 나까지 가면 네 명이다. 원래부터 매력적인 여자였는데 지금은 더 가치가 올라있는 상태다. 말하자면 상한가를 친 주식이다. 지금 들어가는 게 맞는 건가? 오히려 한 타이밍을 쉬어가는 게 나은 전략이지 않을까? 데이트를 나간 세 남자 중 만약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면 오히려 내게 기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첫인상에서는 자기를 택했는데 왜 데이트는 다른 여자랑 나갔는지 오히려 궁금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감정에 솔직했는지 안 솔직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어차피 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 밖에 모르는 거고, 겉으로 보여지는 건 결과일 뿐이지 않나? 그냥 나중에 가치관이 안 맞았네, 성격이 안 맞았네, 지역이 머네, 하는 그럴싸한 말로 대충 얼버무리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