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
포켓몬스터에는 케이시라는 포켓몬이 나온다. 초능력 포켓몬 윤겔라(이스라엘의 초능력자 유리 겔러를 모티프로 한 포켓몬이다.)로 진화하기 전의 포켓몬인데, 이 포켓몬에게는 공격 기술이 없다. 유일하게 갖고 있는 기술은 순간이동이다. 그래서 다른 포켓몬들은 내가 공격을 하거나 몬스터볼을 던지면 반격을 하지만 케이시는 순간이동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무조건 한 방에 잡아야 한다. 도망쳐버리기 전에.
여자란 존재는 케이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한 번에 사로잡아야 한다. 단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안 된다. 자신의 미래에 확신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거나, 차일까봐 전전긍긍해하거나, 데이트 장소를 미리 안 정해와서 땡볕에 걷게 만들면 끝장이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순간이동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런데 그날의 데이트는 너무 많은 것들이 어그러졌다. 나는 정순(사회복지공무원, 당시 32세)과 데이트를 나갔다. 하지만 원래 나가려 했던 건 정자였다. 순자와도 잠깐 대화를 하긴 했다. 정순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정순의 입장에서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택했는지 충분히 의심할 법한 상황이었다.
데이트 코스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촬영 장소를 당일에야 알려주었고, 촬영장의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갔기 때문에 데이트 코스를 검색해볼 여력이 없었다. 정순과 데이트를 나가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주변 맛집을 찾아보았지만 외진 곳에 있는 동네라 그런지 그 흔해 빠진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베이커리 카페 하나도 없었다. 고기를 잘 못 구워서 고깃집에 가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고, 회는 정순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갈 데가 없었다.
운전도 어설펐다. 원래는 경차를 타고 다니는데, 주변에서 여자 만날 때, 특히 방송에 나갈 때는 경차 타고 오지 말라는 조언을 들어서 아버지의 SM5를 빌려 타고 왔다. 운전할 때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주차가 문제였다. 차의 길이와 폭이 다르니 감각이 낯설었다. 내 차였다면 한 번에 슥슥 들어갔을 걸 몇 번을 헤맸다.
이 모든 장면이 전 국민 앞에 공개될 거라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앞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상대방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나중에 어떻게 편집될지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평범한 데이트가 아니라 방송에 나갈 데이트기 때문에 촬영 동선에 맞춰서 차가 들어오는 장면, 식당에 앉는 장면도 따로 찍었는데 이런 게 익숙하지 않다 보니 더 헤맸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있어요?”
데이트 중에 정순이 이런 질문을 했다. 잠시 생각했다. 당연히 있다. 나는 매 순간 진심이었다. 중학교 2학년 이후로 늘 그랬다. 20년 동안 사랑을 찾아 헤맸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정말인가? 누군가를 몇 년 동안 잊지 못했다는 게 그 사람을 깊이 사랑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건가?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게 시간인데? 정작 그동안 내가 한 게 뭐지? 사랑했던 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로 남겼었다? 대순진리회에 쫓아갔었다? 그게 뭐? 그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차라리 폭탄 문자를 보내서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원하거나, 시라노 연애 조작단처럼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한 번은 만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뒤에서는 누가 무슨 짓을 못하나?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긴 했던 건가?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혼자만의 애틋한 감정에 취해있고 싶었던 건가?
생각은 앞에 앉아 있는 정순에게까지 꼬리를 물었다. 그래, 나는 겉으로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사랑을 위해서 무언가를 걸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 그렇다. 원래 택했던 건 정자였고, 지금 당신의 앞에 앉아 있는 건 실은 그냥 도망쳐서 온 것이다. 나는 그냥 내 자존심 상하고 마음 다치는 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비겁자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있냐는 정순의 질문이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지금 내 앞에서 하는 말들, 진심 아니죠?”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매력을 보여주기보다 내 단점을 어떻게 숨길지에 급급했고, 정순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기보다 원래는 정자를 선택했는데 왜 정순으로 번복했는지 변명하기 바빴다.
아니나 다를까 반응이 별로 안 좋았다. 1차로 조개구이집에서 조개탕을 먹고, 2차로는 근처 해안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정순이 1차만 하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리고 데이트 비용은 각출했다. 그날 데이트를 나가지 못해서 숙소에 남아있는 정숙(당시 26세, 무속인)과 순자를 위해 대하구이를 사 가기로 했는데 그거라도 내가 사겠다고 했지만 한사코 마다했다.
거기서 이미 직감했다. 아, 나한테 호감이 없구나. 대부분의 연애에서 남자들은 여자보다 더 많은 돈을 쓴다. 둘 다 부모님한테 용돈 받는 학생 신분이더라도, 같은 회사에 다녀서 소득 수준이 비슷하더라도, 심지어는 여자가 연상이더라도 돈은 남자가 더 낸다. 그래서 남자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더치 페이하는 개념녀를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그런 여자를 만나면 불안해한다. 여자들도 그렇다. 마음에 들면 남자가 돈을 내게 하고, 마음에 안 들면 더치페이를 한다.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데이트 비용이라는 부담을 지우고 안 드는 남자에게 더치페이라는 배려를 한다. 왜일까? 남자다움은 그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여자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역할을 했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과거에는 육체적인 힘으로 지켜줬고, 지금은 돈과 권력으로 지켜준다. 수단이 바뀌었을 뿐 목적은 같다. 남자의 역할은 여자를 지켜주는 것이다.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내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당신을 지켜줄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행위고, 여자의 입장에서는 당신이라는 그늘 아래에서 보호와 예쁨을 받고 싶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그날 데이트에서 정순이 나에게 만족했다면 나에게 돈을 내게 했을 것이다. 그 대신 2차에서 자기가 디저트를 사던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1차, 더치페이, 종료. 나를 남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에 대해 어떠한 마음의 빚도 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