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쩔 수 없는 F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감정적인 인간

by 김선비

나는 INFP다. 내향적(Introvert)이고, 직관적(iNtuitive)이며, 감정적(Feeling)이고, 즉흥적(Perceive)이다. 이 중 다른 건 대체적으로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F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때로 혼자만의 감상에 심취하기도 하고, 내가 했던 말이 누군가에게 혹시 상처를 주지 않았을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F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영락없는 T(Thinking)였기 때문이다. F라고 하기에 나는 분석적이고, 명확한 걸 좋아했고, 뜬구름 잡는 소리와 근거 없는 낙관주의, 입에 발린 예쁜 말들을 혐오했다. 그래도 검사를 해보면 매번 T가 아니라 F가 나왔다. 그래서 그냥 INFP구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F구나, 하는 경험을 최근에 했다. 얼마전에 회사 영업사원들의 성과급 제도를 개편했다. 실장과 본부장을 거쳐 대표까지 승인을 받았고, 공지사항 게시판에 올렸다. 그러자 영업사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컴플레인이었다. 왜 이렇게 기준이 높냐, 왜 이렇게 금액이 적냐, 이렇게 하면 우리 다 죽는다, 하는 것이었다.


다 예상한 것이었다. 그 컴플레인들에 대처할 논리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성과급은 성과를 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작년에 잘한 것에 대해서는 작년 성과급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지 않냐, 작년에 잘했다고 해서 올해에 특혜를 주는 건 회사의 관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할 말은 충분히 있었다. 회사는 나의 실력을 증명해내는 곳이라는 걸, 나 힘들어요, 더 주세요 라는 말은 회사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는 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회사에 다닐 자격이 없다.


그런데 앓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영업직이었을 때 생각이 났다. 그들처럼 나도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 불평불만은 많았다. 그래서 준비한 말들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더라도 불평불만을 가졌을 거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릴 하나 싶었다. 그래서 알겠다, 실장님에게 다시 이야기해보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옆자리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받았던 것과 똑같은 컴플레인이었다. 내가 원래 준비했던, 하지만 마음이 약해져서 못했던 말들을 그대로 했다. 영업사원은 할 말이 없는지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반론을 하지도, 항의를 하지도 못했다.


이래서 내가 F구나 싶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은 분명 T다.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고 상황을 균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사람, 미사여구로 본질을 흐리려 드는 사람을 싫어한다. 때로 염세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도하게 객관적이고 건조한 생각들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행동은 영락없는 F다. 상황을 다 분석했고, 뭐가 이득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도 다 알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냥 감정가는 대로 행동해버린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어떤 논리적 허점이 있는지 다 알고 있고, 그에 반박할 논리도 머릿속으로는 다 준비되어 있지만 그걸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한다. 앓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약해져 버린다. 역시 나는 F다.

keyword
이전 07화상사는 일단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