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를 보고
영화 슬램덩크를 봤다. 재미있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어떤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는데도 그 대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대만이 "포기하면 경기는 끝이에요."라는 안 선생님의 조언을 떠올릴 때, 강백호가 "영감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저는 지금입니다."라고 말하며 부상으로 인한 통증을 참고 경기를 강행할 때 그런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인물은 채치수였다. 탈고교급 센터인 신현철과의 몸싸움에 밀려 코트 위에 넘어져있는 채치수의 머리 위로 작은 악마가 올라온다. 삼지창을 들고 치수의 뒷통수를 쿡쿡 찌르던 악마의 얼굴은 이내 그가 1, 2학년 때 봐왔던 농구부 선배들의 얼굴로 바뀐다. 네가 뭐나 되는 줄 알았냐, 네 주제에 무슨 전국 제패냐, 이 정도도 잘한 것이니 포기하라면서 그들은 치수를 비웃는다.
지금은 전국대회에 출전한 북산고교의 주장이자, 카나가와현 최고의 센터로 성장했지만 1학년 때 치수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타고난 체격과 힘은 훌륭했지만 농구 기술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당연히 유명한 선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전국 제패다. 처음 농구부에 들어왔을 때부터 3학년 졸업반이 되어 마지막 대회를 남겨두고 있는 지금까지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다른 부원들은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스타 플레이어도 아닌 치수가, 농구 명문도 아닌 북산에서, 자기들 같은 평범한 선수들을 데리고 전국 대회에 나가겠다고 하는데 누가 그 말을 진지하게 듣겠는가. 현실 감각 떨어지는 철부지의 과대망상증이라고나 생각하지.
그래서 부원들은 하나 둘 농구부를 떠났다. 치수는 독불장군이라며, 남의 의견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며, 모두가 자기 같이 전국 제패를 꿈꾸는 건 아니라며 떠난다.
하지만 치수는 버텼다. 그리고 결국 목표를 이루어냈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강호들을 물리쳤고, 절대 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전국 대회에 나갔다.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 산왕공고를 이겼다. 그 과정에서 리더로서의 중압감이라는, 자기 자신의 틀을 깨고 한 단계 더 성장했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평생 동안 글을 읽고 쓰겠다는, 나의 생각과 글로 언젠가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물론 포기한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고, 언젠가는 이 일로 성공할 것이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재능과 근성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분명 그 때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했다. 일단 회사에 다니고, 연애와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로 했다. 글은 남는 시간을 잘 갈무리해서 쓰기로 했다. 인생은 기니까, 전국 대회라는 채치수의 목표는 고등학교 졸업 전에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만 글쟁이라는 꿈은 평생에라도 이루어내면 되는 거니까 천천히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끔은 혼란스럽다. 기다리면 정말로 기회가 올지, 평생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닌지, 사실은 그냥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꼬리를 내려버린 것이면서 정신승리하려고 포기하지 않은 척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당장 다 내던지고 글 쓰는 일에 올인할 수는 없으니까, 그랬다간 연애도 못하고 장가도 못가고 부모님 부양도 못할 테니까 일단 내가 처한 현실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래서 채치수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지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3학년 졸업반이 되도록 1차전도 통과해본 적 없는 절망적인 성적, 자기를 믿고 따라주기는 커녕 독불장군이라며 비아냥대고, 너 따위가 무슨 전국대회냐며 비웃기나 하는 동료들. 누구라도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할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감을 이겨내고 목표를 이루어냈다. 현실에 순응해버린 나와는 달랐다. 그래서 고릴라 덩크를 꽂아넣은 그가 "요시!"하고 포효할 때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나도 그처럼 포기하지 않길, 앞으로 마주하게 될 무수히 많은 어려움들에도 당당하길, 그리고 언젠가는 원하는 것들을 이루길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