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가장 파괴적인 조합
최근에 나를 알게 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아마 농담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렸을 적 나는 웃겼다. 이 녀석이 입을 열면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 특유의 분위기는 유머에 감칠맛을 더했다. 실제로는 별로 웃긴 말도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웃기니 뭘 해도 웃기게 들렸다. 그 때의 나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웃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선순환이었다.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웃길 수 있었고, 웃기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더 붙었다.
그런데 점점 그게 없어지기 시작했다. 현실과 부딪히고 깨지면서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많다는 걸, 나는 세상에 흔해 빠진 평범한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없어졌다. 재미도 없어졌다. 재미있는 농담이 생각나도 입 밖으로 꺼낼까 말까 하다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 어쩌다 농담을 던져도 예전 같은 감칠맛이 안 났다. 나는 농담이랍시고 한 건데 사람들은 농담인 줄 모르는 뻘쭘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군대 후임들이나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날 땐 간헐적으로 개그의 불씨가 살아나기도 했다. 그들은 웃긴 녀석이었던 과거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농담을 던지면 웃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오히려 내가 진지하고 무거운 말을 하는 걸 더 어색해했다. 그래서 웃길 수 있었다. 그들과 있을 때면 마치, 지금과는 달랐던, 더 유쾌하고 가벼웠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무겁고 진지하고 느릿느릿하고 다소 의기소침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 지난 몇 년간을 살아왔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개그의 본능은 퇴화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얼마전, 오랜만에 회춘을 하는 경험을 했다. 회식 자리였다. 처음에는 같은 부서 사람들끼리 앉아 있었지만 취기가 오르자 다들 각자 친한 사람들을 찾아 뿔뿔히 흩어졌다. 나도 용기를 내어 다른 부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통성명을 했다. 오늘 발표 인상적이었다느니, 하는 형식적인 몇 마디를 했다. 누군가는 내가 나는 솔로에 나왔던 사람이라며 아는 체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만 아는 그들 부서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지쳐버렸다.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도 없어서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멍하니 앉아 연락 올 데도 없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 자리가 눈에 띄었다. 테이블엔 두 남자 직원과 한 여자 직원이 앉아 있었다. 여자 직원은 내 입사 동기였고, 남자 직원 중 하나는 나와 같은 팀이었다. 다른 남자 직원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여기로 오라는 눈짓을 했고, 나는 갔다. 처음 분위기는 어색했다. 나를 포함, 세 남자가 모두 전형적인 인싸와는 거리가 먼 타입들이었다. 타인에게 가볍게 다가가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걸 어려워할 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몇 마디를 주고 받다보니 비슷한 냄새가 났다. 주파수가 통한다는 걸 느꼈다. 셋 다 봉인이 풀려버렸고, 오랜만에 군대 후임들과 있을 때처럼,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옛날 얘기를 할 때처럼 빵빵 터지면서 떠들었다.
아싸는 아싸들끼리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한다는 걸 느꼈다. 회사는 공동체다. 그래서 대개는 공동체 생활에 적합한 사람들이 회사 생활을 한다. 20대라면 여자와 축구, 30대라면 재테크와 자동차, 40대라면 골프. 가장 무난한 관심사와 성향, 코드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데 어쩌다 하나씩 모난 돌들이 끼어 있다. 남들과 다른 관심사, 다른 개그 코드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인사팀이 실수로 걸러내지 못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대개는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다. 다년 간의 경험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가면을 벗어도 된다는 걸 확인했을 때 그들은 폭주한다. 그들의 범상치 않은 개그 코드를 마음껏 발산한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이 회사에서 보낸 1년 중 가장 많은 말을 했고, 가장 많이 웃었다. 어쩌면 그 1년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이 웃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음 번에 셋이 3 대 3 미팅을 나가기로 약속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동기는 주선을 해주기로 했다. 물론 안해줄 것 같긴 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다. 재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