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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공무원, 사직 철회서 제출

- 면직 후 마주한 진심

by 공쩌리


면직 이후의 현실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조직 밖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낯설고, 서글펐다.


퇴사라는 결정을 지나며,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진심을 마주했다.


# 마지막 한 조각까지, 삭제

사직처리는 1~2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휴직하던 날, 업무수첩과 출근룩 같은 직장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과감히 버렸지만,


이것만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겨 두었던 것이 있다.


바로, 다시는 헤매지 않기 위해

땀과 눈물을 들여 정리한 '나만의 업무 매뉴얼'이었다.


하지만 진짜 사직서 제출 후,

혹시나 돌아갈까 남겨 둔 최후의 병기도

이젠 미련 없이 찢어 버렸다.


# 이직 활동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했다.


무스펙에,

공무원 시험 준비와 근무로 인한 경력 공백,

그리고 나이는 어느새 더 들어 있었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예전에 다녔던 중소기업보다도 더 작은 규모의 회사들이었다.


이력서를 냈고, 곧바로 부리나케 면접을 보러 다녔다.


마치 휴직 후 처음 번화가로 쇼핑을 나갔던 것처럼,

우울증으로 칩거하던 8개월 만의 세상 나들이는 낯설고 어색했다.


면접을 보며 오랜만에 가족이 아닌 사람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ㅈ소기업’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열 군데 정도에 이력서를 냈고,

다섯 곳의 면접 끝에 최종 제안을 받은 곳은 두 군데였다.


한 곳은 연봉이, 사실상 최저임금 수준인 공무원 연봉보다도 더 낮았다.

복지는 전무했고, 근무복을 제공하는 걸 최고의 혜택처럼 홍보하는 곳이었다.


다른 한 곳은 연차가 아예 없었다.


# 라는 조건의 민낯

중소기업 출신에 ‘무스펙’.


공무원 경력은 사회에 나오니 공백기로 취급됐다.


그리고 나는,

30대 중반의 언제 아이를 낳을지 모르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기혼 여성.


결국 이 모든 조건을 고려했을 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참으로 좁았다.


# 불러줘서 고마워... 그런데...

연봉도, 복지도 빠듯한 회사들이

“하루라도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며 몇 번씩 연락을 해왔다.


이게 나를 필요로 한다는 뜻일까, 그냥 사람만 급한 걸까?


현타가 왔다.


# 진짜 면직 후, 마주한 진심

문득, 2년간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전업 수험생이었던 나를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가족이 떠올랐고, 미안함이 밀려왔다.


새로운 회사의 면접을 보러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


익숙한 거리에서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쳐졌다.


당시엔 느끼지 못했지만

버티기 힘든 하루하루

매일 출근길에는 나도 몰랐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공무원이 되기 전, 중소기업을 다닌다는 세간의 평가에 위축되었던 과거도 각났다.


같은 길 위에 선 지금,


나는 다시 그 초라했던 나로 되돌아가려는 걸까.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 조언이 필요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며 ‘배부른 소리’라고 말

한다. 그래서 더는 진지한 상담을 할 수 없다.


가족과도 나름의 이유로 진지한 대화가 어렵다.


정식 심리 상담을 받기엔 이제는 지원받을 곳도 남아 있지 않다.


알아보니 동네 카페에서, 목회와 심리를 전공한 사장님이 3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상담을 해 준다고 한다. 개신교 신자는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을 찾아갔다.


# 쪽팔림은 잠깐이에요

카페 사장님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나서,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쪽팔림은 잠깐이에요.”


마치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고,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창피한 것보다, 살아보는 게 먼저다.


# 철회서 제출

결국,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사직서... 철회하고 싶습니다.”


사직서를 제출한 지 딱 5일 만의 일이었다.




인사교류 실패, 질병휴직, 사직서에 사직철회서 제출까지...

도대체 얼마나 더 구겨져야 끝이 날까.

이 모든 게 입사 1년 만에 벌어진 일들이다.


어쩌다 보니 나의 ‘흑역사’를 전담(?)하게 된 인사팀 주사님은

사직서 철회 요청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체 왜 그러세요...”


그러게요.

정말, 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이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뒤에서 계속 날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진심은,

진짜 면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공무원'이라는 자리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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