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싫어하는 할머니의 기상천외한 밤 몰아내기의 기록
#아놀드로벨#싫어하는것#외부환경에맞서기#집착#욕심#무지#낮을잃어버리다
살다 보면 우리의 삶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파울로 코엘료).
힐드리드할머니에게 피할 수 없는 고난은 밤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밤이 지독스레 싫어서 나방이나 박쥐같은 밤에 움직이는 짐승들을 싫어했을 뿐아니라 잠자는 것도 별빛도 달빛도 싫어한다. 그리곤 밤을 없애야겠다는 의지에 불타 무모한 일을 벌이게 된다.
그림책의 첫 페이지는 작은 창의 커튼 너머로 밖을 내다보는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그건 또다시 시작된 밤과의 전쟁을 위한 비장한 얼굴이기도 했다. 힐드리드할머니가 밤을 없애기 위해 한 노력은 대단했다. 빗자루로 쓸려고도 하고, 삼베자루에 꾹꾹 담으려고도 한다. 가마솥에 펄펄 끓여 날려 보내기도 하고, 칡을 모아 꾸러미로 묶어 보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가위로 자르기. 침대 속에 쑤셔박기, 촛불로 태우기, 자장가 불러 재우기, 주먹질, 때리기, 파묻기, 침뱉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본다
힐드리드할머니의 노력이 대단하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싫어하는 일에 매달리다 정작 환하게 해가 뜰 때는 다시 찾아올 밤과 대적하기위해 잠을 자야만 했기 때문이다. 밤과 대적하기위해 애쓴 열정을 낮동안 사용했다면 할머니는 많은 일을 이루고 잠도 푹 잤을 것이다. 한데 밤과 대적했던 길고 치열한 시간이 지나고 동이 터올 때 할머니는지쳐 또다시 찾아올 밤을 위해 잠을 청한다. 해가 핵산 언덕에 떠오르는 장면에서 누군가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위로의 글을 남긴다. 자신에게 부질없는 저항을 한 할머니를 안쓰러이 여기는 밤이 남긴 인사였을까. 아니면 작가가 던지는 위로의 인사였을까. 하지만 밤을 향해 펼쳐질 할머니의 집착은 계속되어질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방불교의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다. 무지와 무명에서 집착이 오며 자신이 통제권이 없는 일을 붙잡는 것은 욕심임을 말씀해 주신다. 문제가 왔을 때 피하지 말고 알아차리되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하신다. 할머니가 무조건 밤이 싫다는 마음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밤을 싫어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들여다 보았다면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린시절 자신이 밤에 무서운 경험을 했다던지, 혼자서 자는 밤이 무섭다든지, 나이가 먹어가는 것이 두려워 잠을 자고 싶지 않다든지하는 진실 말이다.
밤에 저항하는 일에 집착하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일 뿐 아니라 정작 누려야할 행복한 낮시간을 즐기지 못하게 했다. 아잔 차 스님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직면하되 그것은 모두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기에 붙잡지 말고 놓아버리라고 하신다. 할머니가 겪은 많은 밤들이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범주임을 깨달았다면 일이 일어나는것에는 이유가 있고 때가 되면 정리될 것을 믿어야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외부환경이 아니고 그것을 문제시하는 마음이기에 마음을 관찰하고 정화시키라고 하신다. 알아차리고 놓아버려라.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마라...
나도 할머니처럼 바꿀 수 있다고 착각했던 일들이 많았다. 아이들의 인생을 잘 설계해 주리라는 꿈이 그랬고, 남편이 내 뜻대로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그랬다. 내 마음이라는 기준으로 불편한 것을 부득불 바꿔보려 했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었다. 나의 욕심과 집착으로 그들이 잘 살아가고 있는 삶을 문제시하게 했고 장점을 알아채고 지지해주는 밝은 낮을 잊게 했던 것 같다. 유독 가족에 대한 집착은 말로는 쉽게 벗어나겠다 하면서도 다시금 붙잡기를 계속하게 된다.
이미 성년이 된 두 딸들에게 나는 천연덕스럽게 잔소리를 한다. "건강한 음식 먹어라. 밤에 일찍 자라. 계획해서 일을 잘 해라... "
남편에게도 애정이라는 이유를 붙여 밤낮없이 말하게 된다. "몸에도 안 좋은 술 그만 먹어요. 인생에 도움도 안되는 사람들 만나고 다니지 마요. 운동 좀 하세요..."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바꿀 수 있는 일의 섣부른 포기도 없을 것이고 바꿀 수 없는 일에 어리석게 매달리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아잔 차 스님이라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지도 모른다. 좋고 나쁜 것, 나름의 기준, 의지는 모두 버리라고. 분별하지 말고 자연대로 따라가라고. 그리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들을 하나씩 놓아보내며 텅 비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말이다.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에 감사해본다. 그리고 또다시 되돌아 가더라도 말씀을 접하고 묵상했던 양분들이 내 안에서 잘 자라나 싹티우길 바라본다.
박노해 시인은 시<두 가지만 주소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하지만 그는 시의 말미에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를'
외부의 환경과 문제는 알고보면 문제가 아닌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건 일어나야 했기에 일어난 것이고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필연이라는 것이다. 가족들의 일은 각자에게 넘기면 되는 것을 그걸 붙잡고 단점으로 보고있는 내 자신이 더 문제인지 모른다. 시인은 그것을 바꿀 용기나 인내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겸손한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맑은 마음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