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오리건의 여행>

라스칼 글, 루이 조스 그림

by 신윤상

#자유를찾아서 #고된 삶 #굴레벗기 #자아성취 #새로운 세상열기


빨간 코가 코에 붙어버린 피에로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듀크. 스스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인 굴레 속에서 그는 곡예를 하고 곰을 우리에 넣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피에로에게 곰 오리건은 자신을 오리건주의 가문비나무숲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듀크는 곧바로 답을 주지 못했지만 거울을 보며 분장을 지우다 오리건을 가족들이 사는 숲으로 보내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곰의 처지를 생각하며 곰이 가야할 길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숲에서 백설공주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얹어본다.


마음을 정한 그들은 컴컴한 밤에 서커스단을 떠나 버스를 탄다. 그들이 출발한 스타서커스단이 있는 피츠버그를 떠나 오리건에 가기까지는 먼 길이 예고 되어 있었다. 도시를 통과한 후 기차역에서 시카고행 기차표를 두 장 사며 듀크는 오리건과 함께 떠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오리건를 돕는 길이 자신에게도 자유를 허락해 준다는 것에 듀크는 행복감을 느끼는듯 했다.



그들이 광활한 길에서 얻어탄 트럭의 기사는 듀크에게 묻는다. "왜 아직 빨간코에 분칠을 했소?"

듀크는 "살에 붙어 버렸어요. 난장이로 살기가 쉽지는 않아요"라고 답한다.

그러자 트럭기사는 "이 광활한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울 것 같소?"라고 답한다.

그는 고된 삶을 똑같이 살아내는 동지였다. 그리고 흑인기사는 누군들 쉽지 않은 삶이니 굳이 빨간 코를 붙잡지 말라고 말하는듯 했다. 듀크 스스로가 받아들인 굴레를 이제는 떠나보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에로 듀크와 곰 오리건은 걷고 또 걷는다. 마치 끝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오랜 시간을 그들은 계속 걸었다. 오리건의 가문비나무숲을 향해 간다는 목표가 있었다지만 그렇게 계속 걸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유로움으로 나아간다는 희망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리건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가게 해주는 것을 구실로 피에로 듀크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열어가고 있음을 막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는 비장하고 처연한 걸음을 계속한다. 하지만 힘겹게 걷는 길에서 만난 자연 속에서 생명과 어울리며 둘은 자유로움과 행복함을 느낀다.


반 고흐의 그림에 나올 법한 들판에 이르렀을 때 듀크는 정말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온 세상은 우리 것' 이라 말한다. 곰의 어깨를 타고 노란 들판을 걸어가는 피에로 듀크의 모습은 고단한 인생살이에도 가끔 만나는 황홀한 순간을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듀크는 남은 동전 두 개로 물수제비를 뜨며 더 이상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듀크는 자연과 오리건과 함께 하는 그 시간 속에서 진실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돈에 매인 굴욕적인 삶이 아닌 자유롭고 자기에게 맞는 삶 말이다.


떠돌이 장사꾼과 가수가 되겠다는 슈퍼 종업원, 인디언 추장의 도움으로 마침내 로키산맥 앞까지 도달한 둘은 길 가에 버려진 차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달리는 기차의 맨 뒤에 몸을 실기도 한다. 마침내 도달한 숲. 오리건의 성큼성큼 달려가는 모습은 갇혀지낸 나날을 잊은 것 같아보였다. 오리건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본향이자 본성에 닿아있는 숲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리건에 온 오리건. 오리건은 있어야할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오리건과의 약속을 지키고 오리건과 마지막 밤을 보내는 듀크는 모닥불 앞에서 아침이 오면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떠나겠다고 중얼거린다. 듀크는 어떤 마음을 안고 모닥불을 바라보았을까? 오리건을 숲으로 데려오기위해 가진 돈을 다 썼고 자신의 일자리를 버려야 했던 듀크. 오리건을 보내는 아쉬움은 없었을까? 혼자가 되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한다는 두려운 마음은 없었을까? 자신의 의도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옳은 일을 하기위해 약속을 지킨 그로써는 홀가분함과 뿌듯함,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어우러진 긴 밤을 보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듀크가 숲을 뒤로 하고 떠나는 눈길에는 빨간 코가 떨어져 있다. 자신의 굴레를 버리고 자유를 찾아가는 듀크에게 빨간 코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서커스단의 듀크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오버랩 되는 장면이 있었다. 무력함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30대 시절의 나의 모습이었다. 이루고 싶었던 꿈을 잃고 연년생인 딸아이들을 키우는 육아지옥에 빠져있던 모습이었다. 전업주부이거나 육아가 힘들어서는 아니었다. 내가 절망한 이유는 사는 이유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뭐를 하고 살아야하는지를 끝없이 물었지만 나약하고 지쳐있는 나로서는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빨간 코를 살에 붙이고 살아간 듀크처럼 나 자신을 패배자나 무능력자로 규정하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를 돌고 있었다.


듀크가 오리건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일으킨 것처럼, 아이들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이라도 없었다면 굳이 열심히 살고 잘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듀크처럼 확신에 찬 건 아니지만 그 길이 옳은 길이고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기에 묵묵히 견디며 나아갔다. 나의 목표나 행복은 미뤄두고서.


두 딸아이가 대단한 성공을 하거나 사자가 붙은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본성에 맞는 길로 가고 자아성취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길을 잘 가게 해주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아이들과 지난한 시간을 걸어왔다. 그리고 여전히 부족하고 겁나는 마음으로 나아가지만 점점 오리건의 커다란 숲이 우리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각자의 있을 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며 힘든 시간을 거치며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 사는 힘이 생겨났음을 느낀다. 또 아이들의 좋은 삶을 고민하면서 나에게도 스스로를 돌볼 힘이 생겨난 것 같다. 그리고 가고 싶은 자리를 꿈꾸게 되었다.


나의 아이가 가문비나무의 큰 숲에 이르러 거침없이 달려간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더라도 나는 담담할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굳이 함께 하지 않아도 각자가 있어야 할 가장 좋은 자리를 향해 간다면 서로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 너희들의 인생길을 돕는 엄마라는 약속을 지켰어. 이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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