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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Nov 04. 2021

<청담동 물고기>#6

J에게 물었다( 2)


"나 딸이 있대.."


J는 그 말을 분명하게 들었다. 명확히 전달된 신호였지만 선뜻 내어 놓을 첫마디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소주를 한 병을 빠르게 비우고 나서야 꺼낸 이야기였다.


조금 오랜만이긴 했어도 낮술 한잔 하자는 말이 특별할 것 없는 격조하지 않은 애주가들이었기에 을지로에서 보자는 K의 부름에 이 집 감자국과 머리고기가 유난히 생각났나 보다 넘겨짚은 J는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였다.


"나 딸이 있다고. L 만났어. 애랑 같이 나왔더라."


아이 엄마가 L이 아니었다면 이 상황이 조금 더 납득이 되었을까. 'L이라니. K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그 L이라니. 왜 나타난 거지? 그보다 아이라니..' 몇 초간 숨을 멈췄던 것 같다. 코에서 소량의 숨이 흘러나왔다가 바닷물을 삼키는 고래처럼 들이마셔 가슴을 가득 채우고 다시 내뱉는다. 집어 들었던 순대 간을 접시에 내려놓고 소주를 한 모금 넘기며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한 대응으로 보였지만 사건의 갈피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웬 여자애랑 같이 나왔길래 그새 결혼해서 애를 낳았나 했는데 그러기엔 애가 좀 크고.. 잠깐씩 나를 보는 분위기가 묘한데.. "


L과 함께 하면서 K의 경력은 차츰 내리막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 침잠을 잘 체감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연주인으로 전성기가 지나 설 자리를 잃어가는 업계의 생리겠거니 생각했다. K 자신도 그렇게 여겼다. 자신의 문제이고 순리라고 생각했다. 승자의 자리가 충분한 바닥은 아니었으니까. 라이브나 밴드 음악이 주류에서 점차 멀어지고 그들만의 세상이 되어갔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일찍 엔진을 꺼버린 듯했다. K에게는 아직도 활어같이 파닥거리며 튀어 오르는 음악적 생의 본능이 분명 남아 있었다. J는 승부를 보기 위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스위치를 내리는 K가 안타까우면서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난 K의 생활은 충분이 윤택했다. L은 그의 곁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K를 보살피고 건사했다. 음악적 생산활동과 동시에 사실상 경제력이 전무해진 그에게 L은 나무처럼 우물샘처럼 존재했다. 오히려 K의 지갑은 L명의의 신용카드와 그녀가 채워 넣은 일정의 현금으로 얇아지지 않았다. 항상 단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K의 기호를 반영한 트렌디한 옷가지들도 충분히 공급되었다. 사실혼이나 다름없는 동거를 이어 가는 가운데 L이 가계를 책임지며 금전적으로 인한 어떤 갈등도 표출되지 않았다. 희생으로까지 보인 L의 보살핌이 J는 고맙고 든든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요람 같은 삶 속에서 K의 눈빛은 탁해져 갔다. 이따금 가까운 동료들 여럿이 파트너를 동반한 모임을 가질 때 K는 어딘지 그 안에서 겉돌며 안착하지 못했고 잠깐의 물음표만 띄우고 넘기기엔 말끔하지 못한 L과 K의 모습이 J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온전히 건강한 관계에서 라면 단 한 번도 연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K가 L에게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J의 눈에 실제로 그 잠식의 순간이 보였다. 하지만 부딪히는 술잔과 음악에 어우러진 경쾌한 웃음소리, 혼재하는 대화의 교차를 뚫고 J가 그 실체에 더 가까이 가보려 할 때 L은 늘 상냥하며 생글거렸고 그들은 곧바로 주변을 밝히는 근사한 커플로 돌아와 있었다.


'L, 이 여자를 모르겠다..'

마치 세모난 네모처럼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존재를 만난 것 같았다. 어느 날 발견된 이 찰나의 이질감은 J에게 친구의 여자를 향한 경계의 촉수를 드리우게 했다.


"거기 누구 있는데? 아.. 오늘이야? 가야지! 여기 사람들 다 가도 되나? 자리 넓어? 응 K도 있어. 형 보고 싶대!"


다른 자리에서 벌어진 술자리에 남자들만 따로 2차를 가자는 제안이 있었고 전체적으로 그 분위기로 흘러가는 가운데 L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K는 집에 가야 해."라고 말하곤 막상 그의 의견을 묻지는 않았다. K는 다른 자리에 있던 선배를 보고 싶어 했다. 2차 얘기가 나왔을 때 화색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K는 결국 다른 쪽의 모임에 동행하지 않고 L과 함께 돌아갔다. 함께 있던 일행들도 조금 석연치 않아 했지만 분위기에 휩쓸리며 더 문제 삼지 않고 다음 자리로 이동해갔다. 이때부터였다. 그간의 K 커플의 미묘한 부자연스러움과 L의 미소 끝에 남겨진 서늘한 흔적이 우려에서 경계로 그 단계를 상승시켰다.


'이 여자를 모르겠다.'


참으로 근거와 정당성이 빈약한 의심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는, 어떤 이보다 응원하고 격려해야 할 사람이었다. 함께하는 공간을 환히 밝히고 누구나 호감 가득히 다가가게 만드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저들의 관계에 간섭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J는 L에게서 눈을 거두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L을 지우고 새로 시작했다.


'정말 K의 딸일까..'

K가 L의 집을 나오기 직전 바닥을 쳤다고 봐야 할 그 시기에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라니, J로서는 아이가 수정된 순간을 손가락으로 꼽아 계산이라도 해보고 싶을 노릇이었다.

그러나 L이 선언하지 않았나. K 너의 딸이라고. 그리고 눈앞의 K가 핏줄의 인력으로 저리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 나 거의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앉아있다 왔어. L만 있었으면 뭐라도 물어보고 했겠지. 근데 애가 상황 파악 다 끝난 거 같은 눈으로 내 앞에 있는데, 거기서 무슨 사건을 재구성 하겠어. 아무 말 못 하고 L 얘기만 듣고 왔어. 그래서 너무 답답하고 그냥, 모르겠어 아빠가 된.. 된 건데, 내가 아빠가 된 건데.."


소주잔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며 K가 딸과의 조우의 순간을 그려준다. 몇 해 전 다투었던 일 말고는 그들이 무거운 공기로 술자리를 채웠던 적은 없었다. 두 친구의 술자리는 언제나 이야기의 소재가 많고 생동감 넘쳤다. 시시콜콜한 음담패설부터 현실적인 고민과 음악, 삶 그리고 예술에 대한 탐구와 토론으로 풍성했다. 하지만 K는 J가 L에 대해 갖고 있는 의구심과 굳어져가는 적대감을 모르고 있다. J는 L로부터 K를 해방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L은 세상에 없을 조강지처였고 K는 전생에 나라를 구하고 여신을 차지한 장수였다.


"너도 알잖아 나하고 L은 끝났잖아. 끝내야 됐잖아. 뭐가 이렇게 되는데! 딸이라니.. 아니 무슨 생각으로 혼자 낳아서 키운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 애를 안고 온 것도 아니고, 애 눈을 보니까.. 깊어.. 다 컸어. 다 알고 있어. 너무 빨리 컸어! 그래서 미안해져. 애가 왜.."


고교시절부터 이십 년이 넘게 사귀어 온 친구 J는 K가 여러 문턱에서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고 그를 지탱해 주었다. 친구의 쓸쓸한 눈빛과 처진 음색을 지나치지 않고 아픈이의 신음이 가시면 장황하지 않은 위로를 담백하게 전할 줄 아는 속 깊은 친구였다.

그런 K가 또 넘어져 깨진 무릎을 부여잡고 있다. J는 최선을 다해 그 상처를 봉합하고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러나, 해결사 J가 아직 첫 운을 떼지 못하고 있다.


소주 한 잔을 더 털어 넣은 K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 속도를 더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3년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는데도 끝났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 근데 그게 이미 다 끝난 건데 나 혼자 붙들고 있는 거 같기도 해서, 나만 놓으면 정말 다 끝나는 거 같아서 확 그래 버릴까 하다가 그게, 또 너무 무서워서 그냥 우물쭈물거리다.."


K는 벌써 넉 잔째 음식은 먹지 않고 소주만 들이키고 있다.


"너 자다가 숨 막혀서 깨 본 적 있냐? 그거 영화에서만 나오는 거 아니다. 정말 숨이 안 쉬어져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 뭔가 목을 조르나 봐. 편하게 잘 생각하지 말라고.."


L이 K의 인생에서 사라지고 친구의 부활을 바라고 응원했던 J는 여전히 웅크린 그를 지켜봐야 했다. 그의 침잠은 유지 중이었으며 회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K를 좀 먹고 있다고 규정한 L의 부재가 친구를 더 연약하고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것에 자책하기도 했다.


'L은 K에게 결국 햇살이었던가. 진정 세상을 구하고 받은 선물이었을까.'


"애 이름이 민아인데 지금은 L 호적에 있고. 씨발, 내 딸인데 남 얘기하듯 한다. 하..! 지랄 같네.. 애가 참 밝아! 나보고 어색해하지도 않고 , 웃어주더라.. 후...!" 


더는 뱉어낼 것이 남아있지 않을 한숨이었다. 


"애 없을 때 다시 얘기하자는데.."


다음을 기다렸지만 K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눈이 풀리고 흐트러져가는 모습이었지만 한마디 건넬 틈은 느껴지지 않는다. 말없이 술잔만 오갈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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