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졸린 눈
"엄마, 아빠 어딨어?"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던 민아가 툭 내던진다.
".... 미국에 있잖아. 뉴욕에."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스러웠지만 차분하게 답했다.
"미국에 전화 없어? 왜 나한테 전화 안 해?"
"거기는 너무 멀어서 민아가 잘 때 아빠는 안 자고 일어나 있거든. 민아 잘 때 깨우는 거 싫어하잖아.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래서 아빠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민아 잘 있냐고, 보고 싶다고 하지. 왜 아빠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근데 아빠 공연 맨날 해?"
L은 K가 음악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두었다. 공연의 개념을 잘 이해 못 하는 딸에게 밴드 공연 영상을 자주 보여주며 이해시켰다.
"아빠 노래 잘해?"
노래하는 입모양과 여러 자세를 취하며 자신이 상상하는 아빠의 모습을 연출한다.
"아빠는 연주하는 사람이야. 민아, 기타 알아?"
"몰라."
휴대폰에서 기타의 이미지를 찾아 민아에게 보여주니까 본 적이 있다며 그 모양이 예쁘다고 좋아한다.
"그럼 아빠 이거 잘해?"
"응, 잘해.. 정말 잘해. 사람들이 막 소리 지르고 박수쳐줘."
엄마의 휴대폰에 시선을 한참 고정하던 민아가 "보고 싶다. 아빠." 라고 읊조린다.
잠시 생각에 잠긴 L은 자신의 노트북을 가져와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폴더의 어느 파일을 재생시켰다. K가 스스로 좋은 연주와 무대였다고 만족스러워하던 공연의 영상 파일이었다.
"여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아빠야. 기타 메고 있지?"
"아빠 예쁘다."
작은 손을 가져가 화면 속의 K를 만진다.
"나도 빨간 옷 있는데 아빠도 있네."
잠깐 동안 두 모녀는 말없이 화면 속에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민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아빠가 부르면 당장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걸 안다면 이 아이는 어떤 마음일까.
언제고 다가올 상황이었고 이제 딸에게 아빠의 곁을 만들어 줘야겠다고 엄마는 생각했다. 민아는 그 영상을 한참 동안 그리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봤다.
"미국에는 이런 거 없어?"
"응, 찍어주는 사람이 없나 봐. 그리고 아빠가 누가 막 찍고 그러는 거 부끄러워해서 이것도 몰래 찍은 거야."
"아.. 아빠도 민아처럼 부끄럼쟁이구나."
"그럼 아빠 딸이니까 닮았지."
민아가 기분이 좋은 듯 환하게 웃는다.
"왜?"
"아빠랑 닮아서 좋아."
"아빠가 좋아? 멀리 살고 민아 보러 오지도 않는데?"
"응. 머리 막 뒤로 이렇게 하고 반짝반짝하고 좋아. 태영이 아빠가 어린이집에 와서 막 안아주고 손잡고 하는데 우리 아빠가 더 잘생겼어. 더 예쁜 옷 입었어."
".... 아빠 한국에 오라고 할까?"
"응! 아빠 올 수 있어?"
"민아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하면 아빠가 비행기 타고 오겠지. 아빠가 민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많이 사랑하고."
"그럼 오라고 해! 지금 오라고 해!"
"지금 바로 와도 민아 자고 있을 시간에 올 거야. 미국이 여기서 많이 멀잖아. 비행기 알지? 자동차보다 빠른 비행기 타도 오래 걸려."
"슈퍼 윙즈에서 브라질까지 금방 가던데. 브라질도 먼데."
"그건 만화 보는 아이들이 오래 기다리지 말라고 빨리 가게 만든 거야. 만화 안에서만. 실제로는 10시간 넘게 걸려."
"나 자고 있을 때 와도 괜찮아. 일어날 수 있어. 아빠 오면 나 꼭 깨워. 진짜로 일어날 거야."
그날부터 민아는 새벽에 자주 잠에서 깼다.
아빠가 빨간 재킷을 입고 자기한테 작은 기타를 선물로 가져왔다고 했다. 잠에서 깰 때마다 투정 없이 반짝이는 졸린 눈으로 아빠를 찾았다. 그게 꿈이었어도 그리던 아빠가 오지 않았어도 민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의연한 민아의 태도가 L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K를 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패로 끝난 선택 K를 다시금 자신의 세계에 들여야겠다고. 지금의 이 평화가 깨질지라도 한 번의 베팅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민아와 용인 쪽에 낚시를 왔다. 주말이면 낚시나 캠핑을 위해 근교로 함께 떠나는 부녀였다.
"남편? 걔가 니 남편이라고?"
"응..!"
"그냥 남친 정도로 하지 뭔 남편이야. 그래서 이거 내꺼 아니고 그놈 꺼라고? 하.. 이게 뭐라고 가슴 아프네."
"아, 왜 그렇게 마음 약한척해?"
"아빠 마음 약해. 삐돌이야. 그거 봤을 때 나 주려고 만든 줄 알았거든."
"엄마한테 달라고 해."
한참 전에 던져둔 찌는 아무 신호가 없다.
"... 낚시 오는 거 재미있어? 그냥 캠핑만 할까? 물놀이할 수 있는 곳도 있는데."
"아니 여기 물이랑 흙이랑 많아서 좋아. 밖에서 라면도 먹고. 아빠 라면 맛있어. 엄마는 으.."
"엄마가 라면에 좀 약해. 뭐 다른 것도 강하진 않다만.. 옛날에 아빠가 라면가게나 할까 했더니 엄마가 바로 하나 차려주겠다고 했을 정도라고 내 솜씨가! 지금 라면 먹어?"
"아니, 고기 먹으면서 먹을 거야."
간소하게 상을 차리고 불판에 불을 지핀다. 고기가 익어가는 사이 K는 소주 한잔을 넘기고 가져온 김치 한 점을 씹는다. 씁쓸함 뒤에 달큰함이 스며온다. 눈앞에 앉아있는 딸아이가 생경하다. 단출하지만 딸아이와 함께 하고 있는 이 하루가, 저 노을이 이유 없이 불안하다. 네 것이 아니라고 어디선가 경고하는 것 같다.
"안 추워? 이제 낚시 말고 다른 거 하자. 너랑 밖에서 자는 것도 걱정이고."
"차에서 자는 거잖아."
"그렇긴 한데, 여기가 정식 낚시터나 캠핑장도 아니고.. 수영장 있는 펜션 같은데 가자. 편하잖아."
"거기 안 비싸? 아빠 돈 없다고 하던데."
"누가?"
"엄마가. 엄마는 돈 많은데."
"그래? 참 나, 좀 달래서 아빠 만날 때 챙겨 와."
고기쌈을 하나 싸준다.
"라면도 지금 먹자. 아빠 소주 한잔 한다. 딱 한 병만 먹을게."
"나도 먹어볼래."
"안돼..!"
"왜? 한 번만, 응? 쪼금만.. 궁금해."
말똥 거리는 눈을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훈계하기 싫었다.
"....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그리고 다른 데 가서 다른 사람 하고도 안돼! 너한테 안된다는 말 하는 거 정말 싫은데, 이건 아빠하고 약속해줘야 돼."
"알았어!"
"약속, 도장, 싸인, 복사!"
죽이 잘 맞는 동작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냥 이거 조금 마셔봐."
자신의 잔에 남아 있던 걸 건네고 민아는 입술만 축이더니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바로 뱉고 인상을 찌그릴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러더니 마저 목으로 넘기고,
"이상하네. 맛이 진짜 없네! 아빠는 왜 그렇게 맛있게 먹어? 꿀꺽 소리도 나고. 진짜 맛있는 줄 알았는데.."
싱거운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런 맛으로 먹는 게 아니야, 그니까 어디 가서 먹지 마. 아빠가 된다고 할 때까지. 지금 안 먹어도 나중에 먹을 일이 많이 생겨. 그때 맛도 알게 되고. 그리고 기분 좋을 때 먹는 게 좋아. 안 그럼.. 아니다.."
고기를 뒤집으며 오물오물 쌈을 씹는 민아를 바라본다. 아빠가 집에 없는 생활이 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건강하고 당차고 순수한 이 아이가 보이지 않게 곪아 가진 않을지 착잡함이 밀려온다. 둘만의 시간을 함께 하며 참 잘 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록 평범한 환경조차 마련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친구들한테 아빠 노래 들려줬어. 동영상도 보여주고."
"왜? 그거 완전 옛날 거라 구릴 텐데."
"나는 좋아. 그 빨간 옷 입고 기타 치는 거. 머리 다 넘긴 거."
한 아이가 눈앞에 앉아 있다. 내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아빠를 많이 아끼는 딸아이가 웃고 있다. 나에게 무관심하던 신으로부터 뜯기기만 하던 인생에 시원하게 환급을 받아낸 것 같다.
잠든 민아를 안고 아이방 침대에 눕힌다. L과 간단히 눈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선다. 주말여행 후 민아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 길다. 행복과 인생의 재미를 찾는 것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민아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은 항상 가슴이 저민다. 자신의 오피스텔로 쓸쓸히 돌아오며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자각한다.
나는 불행하다.
L과 민아가 사는 집도 K의 오피스텔에서 걸음으로 5분 거리다.
그러나 해외로 가족을 떠나보낸 기러기 아빠들보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주말 부부들보다 그 마음의 거리는 하염없이 멀다. 어서 내일이, 월요일이 되어주길 바란다. 오늘의 이 공허함에 마비가 오고 행복을 찾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되어주길 바란다.
나는 외로워도 된다. 나는 불행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