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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Nov 25. 2021

<청담동 물고기>#9

J


                                                                                    




"그러니까 내 말은 그거야. 그냥 좋은 사람들하고 재미있게 방송하고 끝나고 뒤풀이하고. 별 거 없어. 근데 그거를 안 도와주더라고 이 새끼들이, 어? 그 싸가지 없는 피디 새끼가 나보고 '선배님, 시대가 변했어요. 이 지랄을 하는데 아, 그걸 내가 어떻게 듣고 있어!?"


2000년 초반 노래 한곡이 히트하고 유명세를 탔던 J는 연이은 송사와 새 앨범의 부진으로 그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이제는 그 시절 사람들만 간간히 알아보는 지나간 가수다. 끊이지 않았던 연애경력과 여성편력으로 현재 독신이지만 늘 생의 동반자를 찾고 있다. 석 달 전부터 YouTube 채널을 개설해서 진행하고 있다.


"예능이 다 그렇지 뭐. 카메라 안 돌아가면 다 인상 쓰고 있다며. 불 들어오자마자 눈 돌아가서 달려들고."


"그래서 이, 나랑은 안 맞아. 영혼까지 순수한 나랑은 가는 길이 다른 거라고. 매니저가 자꾸 잡는데, 그것마저 안 하면 안 된다고. 행사도 안 들어온다고."


"유튜브는? 그것도 매니저가 핸들링하는 거야?"


"그건 제작자가 따로 있어. 그래도 그건 그나마 재밌게 할 때가 많지. 내가 공중파랑 사대가 안 맞지 않냐. 기본적으로 내 유전자는 언더그라운드야."


"니가 뭘 언더야 이 새끼야. 한곡 내고 바로 떠가지고 한참 따뜻했으면서."


"그거 한곡뿐이잖아. 기분 붕 떠 있다가 내다 꽂은 거지. 그 말 같지 않은 소문나고 아! 내가 진짜 그 쪼그만 애를 왜 만나서.."


소주 한잔을 털어 넘긴다.


"그래도 너 걔랑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지."


"니가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올 때마다 다 결혼한다고 했었지."


J는 머릿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대며 소주 한 병을 더 시킨다.


"나는 하루를 만나도, 아니 딱 한 시간 사랑을 나누더라도 내 남은 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면 시작을 안 한다고!"


"기다려봐라. 어디선가 네 아들 딸들이 커가고 있을지 누가 아냐. 가장 극적인 순간에 나타날 것이다."


"흐흐흐, 민아 같은 딸내미였으면 최곤데."


"역시 비극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구만."


"뭐가 비극이야 미친놈아. 너 요즘 사람 같은 얼굴하고 있는 게 누구 덕인데!"


"아빠 노릇을 너무 후지게 하고 있어서 그렇다.."


"이게 틈만 나면 다크 해지려고 하네. 시끄럽고 다음 주에 방송 한번 나와. 테마가 딱이야. 2000년대 인디뮤직."


"뭔 소리야..! 그럼 자료를 띄우던지 젊고 잘 나가는 애들 불러서 노래나 몇 곡 시키지 내가 왜 나가."


"젊고 잘 나가는 애들이 우리 방송에 왜 나오니? 따땃한 데 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불러주는 데가 없어야 나한테 오는 거야. 급 있는 애들은 뭔 사고 치고, 인기 좀 떨어졌을 때 찔러보는 거고."


"나가서 연주하고 그래야 돼?"


"아 뭔 소리야? 그냥 노가리 까는 거지. 여자 얘기나 하면서. 우리가 맨날 하는 거! 근데 우리 막내작가 이쁘다."


"작가도 있냐? 그냥 썰 푸는 거 아냐?"


"아 이 새끼가 방송을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아주 정교하게 세팅된 난장판인 거야. 아무튼 요새 걔가 내 유일한 낙이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조심해."


"그냥 이쁜 조카 같은 마음이야. 내가 설레지 않으면 그냥 동생이나 친구로도 여자를 곁에 안 두잖냐. 무려 여자를 앞에 두고 왜 지루하게 있어."


"니가 임자를 못 만나서 그러지. 일단 오케이."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취업을 하고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연주하는 것을, 무대로의 복귀를 그려보기도 했다.


"요새 주말은 L 집에서 잔다며?"


"어디 기사 났냐? 나 너한테 말한 기억이 없는데."


"민아가 말해줬지. 그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내가 너희 부부와 네 가족한테 관심이 많다는 거 알잖아."


"지랄하고 있네. 너나 그 큰집에 혼자 있지 말고 1인 가구나 벗어나."


"뭐 그쪽으로 내가 할 말은 없다마는, 아무튼 요새 L 하고는 어때?"


"민아 얘기만 하고 애 없이 둘만 있을 땐 많이 어색했는데, 요새는 각자 사는 얘기도 공유하는 정도가 됐지."


"좋네, 좋다! 그런 식으로 풀리는 거지. 어쨌든 우리 민아를 봐서라도 잘해라."


"근데.. 나는 지금 똑같은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본질적인 건 변하지 않았는데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거지. 뭐, 자식 하나 잘 키워 보자는 평화협정 같은 거..?"


술잔을 비우기 무섭게 J가 각자의 빈 잔에 술을 따른다.


"천천히 마셔. 기분 좋냐?"


"오늘 나쁘지 않지. 흐흐.. 야! 뭐가 됐든 평화롭잖아. 너 인마 예전보다 많이 단단해졌어. 매일 출근하고 규칙적으로 살아서 그런가 건강해 보이고. 요새 술 많이 안 먹지?"


"많이 줄었지. 혼자 먹어봐야 센티해지기만 하니까."


둘은 잔을 부딪힌다.


                                                                             




방문을 살짝 열고 L이 고개를 들이민다. 민아가 태블릿 피씨를 얼굴에 파묻을 듯 가까이 두고 있다.


"10분만 더 해. 진짜로!"


"내일 학교 안 가잖아."


"아빠랑 낚시 가니까 피곤하면 안 될 거 아냐. 그리고 눈 나빠진단 말이야. 안경 쓰고 싶어?"


"아니야 내일은 아빠 집에 갈 거야."


순간 멈칫한다. 반쪽짜리 별거를 하면서 막상 전남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피스텔에서 40대 남자 혼자 사는 것, K의 성격으로 미루어 정돈이 제법 잘 되어 있을 것이지만 쾌적함을 떠나 자기 딸을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공간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던 아빠와 그 거처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던 딸의 태도 변화에 그 의중을 알 길이 없다. 민아가 아빠만의 공간에 들어가 본다면 분리된 된 부모의 삶을 실질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주변에 몇몇 있을 주말부부의 모습을 띈 세 식구였지만 명백히 부부 관계는 끝이 났고 자녀에게 그 영향을 최소화하려 부단히 애쓰던 부모들이었다.


그런데 아빠와 딸아이가 그 사실을 직접 마주하기로 한 것이다.

어린 민아가 용기를 내었다. K도 이번 주말은 아빠 집에 가고 싶다는 딸의 말을 에둘러 거절하거나 피하지 않고 어떻게 흘러갈지를 지켜보고자 받아들였다.

가족이 지금의 자신들을 조금 더 투명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와, 어항이다. 이거 언제 샀어?"


"산거 아니야. 아빠 아는 사람이 줬어. 이제 장사 안 한다고."


아빠 집에 처음 온 민아가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어항에게 눈길을 준다.


"나도 주지. 근데 왜 물고기가 한 마리야?"


"몰라. 원래부터 한 마리였어."


"이름 있어?"


"아니."


"왜?"


"그냥. 이름 부를 일이 없잖아."


"에이.. 내가 지을래!"


"그래, 잘 됐다. 이름이라도 있어야 같이 사는 맛이 나지. 뭐 먹고 싶어? 그냥 나가서 먹을까?"


"아니 아빠가 만들어 주는 거. 뭐 할 수 있어? 라면 말고! 얘는 뭐 먹고살아?"


"그 옆에 있잖아. 그 녹색 봉투. 파스타 해줄까? 토마토소스로."


"응, 알았어."


"'마리'라고 할래."


"물고기 이름? 여자 이름이잖아."


"응. 여자일 거 같아. 머리가 길잖아."


어항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딸내미가 귀여워 싱긋 웃는다.


"혹시 맛 없을지도 모르니까 피자도 한판 시키자."


열 평 남짓한 공간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탁자에 자기 사진과 가족이 모두 함께 있는 액자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그러다 구석 거치대에 세워져 있는 기타에 시선이 멈춰 선다.


"아빠 기타 맨날 쳐?"


"아니, 안친 지 오래됐지. 버리기 뭐 해서 그냥 뒀어. 그거 J 삼촌이 준 거야. 삼촌이 너 진짜 이뻐한다."


"히히, 삼촌 진짜 웃겨. 엄마도 오라고 할까?"


"안 올 거야. 그리고 집 좁아서 사람 많으면 앉을 데도 없어."


"세명이 뭐가 많아? 나는 침대에 앉으면 되지."


"주말은 엄마도 쉬어야지. 평소에 너 데리고 다니고 잠도 못 자고, 이런 날 엄마도 친구도 만나고 잠도 많이 자고.. 아빠랑 둘이 있는 거 심심해?"


"아니, 아빠랑 있을 때가 제일 좋아. 아빠 너무 사랑해."


"... 아빠가 더 사랑해. 근데 세상에서 민아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야. 알지? 아빠는 2등."


"맞아. 아빠는 2등.."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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