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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Dec 09. 2021

<청담동 물고기>#10

전화가 걸려온 밤

"아니, 아빠랑 있을 때가 제일 좋아. 아빠 너무 사랑해."


"... 아빠가 더 사랑해. 근데 세상에서 민아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야. 알지? 아빠는 2등."


"맞아. 아빠는 2등.."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민아를 보니 자고 있었다. 밤 열 시가 다 되어 영화보기를 시작했으니 끝까지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제법 집중해서 보던 아이가 완주 직전에 잠이 들었다. 아이를 침대로 옮겨 눕히고 설거지를 한 후 집안 곳곳을 간단히 정리했다. 조금 홀가분해지고 얼큰한 무언가가 생각나 냉장고를 뒤져 안주거리를 찾아 데우고 소주 한 병과 김치도 꺼냈다. 옆 세대의 소음이 잔잔히 전해질만큼 고요했지만 곁에 잠들어 있는 아이의 존재만으로 허전하지 않았다.


'당신, 나보다는 살만 하겠어.'

주말의 끝마다 찾아오는 상실감으로 L은 자신처럼 괴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시각, 이런 적막함 속에 혼자 놓여 있었다면 그 평온은 고독의 다른 말일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이혼을 하고 1년쯤 지나서 K는 예전에 함께 작업을 했던 후배와 수개월간 데이트를 했었다. 이혼을 했고 아이도 있는 그의 사연을 알고 있는 후배가 먼저 K에게 다가왔고 그녀와의 만남이 자리 잡혀가고 깊어질수록 K는 안정을 찾아갔다. 그 후배도 K와의 더 진지한 관계를 떠올려 볼 만큼 둘의 만남에 만족하고 집중해갔다. 그렇게 두 남녀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때에도 K는 민아의 영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주말은 절대적으로 민아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도 그 시간에는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상대의 전부를 받아 품 안에 안고 싶어 한다. 무언가 남겨둔 마음이 완전하다고 여겨질 리 없고 그렇게 끝까지 다 열리지 않는 마지막 문은 맞은편의 사람을 날로 조급하고 지쳐가게 했다. 그녀와의 관계가 결국 정리되었을 때 붙잡을 생각이 없던 K는 작은 이별이라 여기며 담담해했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현실이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왜 혼자 있지 못하는가. 자신과 만나 사색하고 내적 성장을 이뤄갈 수 있는 시간에 나는 왜 가장 낮고 깊은 곳으로 침몰하여 나를 방치하는가.


어딘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노지 캠핑이 아닌 소박한 자신의 공간에서 저녁 내내 딸아이와 넘치게 흥겨운 시간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TV나 음악을 틀어 의식적으로 소음을 만들어 이 작은 공간을 채우곤 했지만 오늘 밤은 어떤 볼 것이나 들을 것도 필요치 않았다.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돋아보일 만큼의 가득 찬 고요 속에서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지금 서울 강남 한복판에 미사일이 한방 떨어지고 전쟁이 난다면 늘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못난 나일 지라도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당장에 강인한 아빠로 각성할 것이다. 지금 K는 그렇게 강력한 자신을 보고 싶고, 사력을 다해 세상을 살고 싶어졌다.


바로 지금, 세상의 멸망과 맞바꿔서라도 나를 깨우고 싶다.

창밖의 야경이 아름답다. 전쟁은 일으키지 말아야겠다.


술이 조금 더 들어가고 허기가 느껴지며 라면 생각이 났다. 주방 쪽으로 몸을 움직이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L이었다. 자정 가까이 시각에 그녀에게 전화가 온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민아는?"


"자.. 같이 영화 보다가 잠들었는데 그냥 재우게."


"치카치카했어?"


"밥 먹고 좀 있다가 알아서 하더라. 영화 보다 잠들 줄 미리 알았나?"


"뭐 보다가 잘 안 자는데 피곤했나 보네."


"좀 늦게 시작했어. 아이패드 너무 많이 보길래 그만 보게 하려고 영화나 보자고 했지."


"뭐 봤는데?"


"E.T"


"진짜 옛날 영화 봤네."


"응, 보여주고 싶었어. 나도 다시 보고 싶었고. 이티 잠깐 죽는 장면에서 흐느끼면서 울더라. 순간 울컥했네."


"... 애가 감성적이고 눈물도 많아. 누구 닮았나 봐."


"... 전화 왜 했어? 걱정돼서?"


"뭐 그렇기도 하고.."


"들판으로 캠핑가도 전화 없더니, 집인데 뭘."


"자긴 뭐해?"


"매운 거 생각나서 닭발이랑 소주 한잔 하고 있어. 라면도 하나 끓일까 하고. 오늘 뭐 했어?"


"집 정리하고 서류 작업할 거 좀 했지."


"집에 애도 없고, 한가할 때 좀 쉬지. 아님 나가 놀던가."


"한가할 때가 없지, 내가."


늘 바쁜 L이었다. 일을 만들어서 했다고 해야 할까. 건조한 분위기로 한 공간에 있기가 불편할 땐 일을 하러 나갔다. 맞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둘이 붙어 있는다고 능사는 아니었을 테니. K는 냉랭한 상황에서도 함께 있기를 택하는 쪽이었다. 그만큼 혼자 있는 것에 취약했다. 하지만 몇 년째 혼자 살고 있는 그가 이제는 혼자여서 좋은 것을 조금은 안다. 그리고 멈춤이 없는 L의 삶도 그런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덜 안쓰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별하고 떨어져 지내면서, 음악이 아닌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런데 L의 목소리에 적적함이 느껴진다. 소주 한잔 하자고 하면 건너올 것도 같았다.


"하루 종일 집에 있던 거야?"


"응 사무실 잠깐 갔다 오고."


"밥은?"


"안 먹었어."


"여태 아무것도?"


"계속 커피 마시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라면 먹으러 올래?"


잠시 후 동시에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내가 해놓고도 어이없네."


웃음이 쉽게 가시지 않고 애가 깰까 봐 소리를 죽이니 더 주체가 안되고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다.

전화기 건너 L도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로 웃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밤, 이혼 한 전 남편과 전 부인이 할리우드 영화 속 졸업파티의 고교생 마냥 싱그럽다.


"치즈 있어?"


"없어. 아, 자기 라면에 치즈 넣는 거 좋아하지? 오면서 사와. 라면 먹고 소주 몇 잔만 하고 가."


"민아 깨면 어떻게?"


"깼을 때 다른 여자 있는 거보다 낫지?"


다시 한번 콧소리 가득한 웃음이 들려온다.


"잠깐 왔다가 귀신처럼 홀연히 사라져."


"... 알았어, 출발하면서 다시 톡 할게."


L은 그날 오지 않았다.

그냥 집에 있는 것으로 대충 때우겠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후로도 L이 이곳에 온 일은 없다.


뭘 더 먹을 생각도 사라져 그냥 잠을 청하기로 했다.

둘이 자기에 침대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서 바닥에 이불을 깔았지만 졸리기 전까지 민아 옆에 누워 잠자는 천사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무언갈 꺼내고 와인 몇 잔에 허기를 달래고 있을 L이 떠올랐다. 민아가 내 곁에 있으니 그녀가 혼자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한쪽은 혼자여야 하는 그들. 그녀가 늙어가는 걸 보고 싶고 곁에서 함께 늙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것대로의 계획을 고집하며 지금 이 지점에 두 사람을 놓아두고 있다.


잠이 안 온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던 L에게 하듯 민아를 쓰다듬으면서 문득 L이 자신을 길들이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L과 함께 하며 곱게 분무되는 포근함에 젖어 그녀를 더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K는 종국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L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마찰 없이 동행하는 삶을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몇 번을 되풀이해서 새로 시작할 기회가 주어졌을지라도 얄궂은 인생이 훼방을 멈추고 공정한 심판 인척 팔짱을 끼고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역시 이 자리에서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길들임이라고 하기엔 염치없을 만큼 L의 손길은 폭신했다. 자신에게는 그것이 수렁이라 결론 내리고 혹자에게 배은망덕한 한량으로 비난 받으면서까지 삶의 결정권을 회복하는 길은 달콤한 꿈속에서 자살을 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확신이 충분하지 않은 결단이었다. 그러나 K는 단검으로 자기 가슴을 찌르고 그 꿈에 취한 자신을 깨웠다. 그렇게 마주한 현실은 한 번도 써본 적 없던 신체기관을 사용하는 것처럼 눈이 시리고 내딛는 걸음마다 관절이 아려왔다.

하지만, 나다운 보법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라면을 먹으러 오라니..'

L에게 한마디 던지고 함께 웃고 난 여운이 아직 그 안에 맴돈다.

'그래.. 우리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천천히 멀어지자.'

바닥에 마련한 잠자리로 옮기지 못하고 민아 옆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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