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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Nov 11. 2021

<청담동 물고기>#7

24.12.12

다음을 기다렸지만 K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눈이 풀리고 흐트러져가는 모습이었지만 한마디 건넬 틈은 느껴지지 않는다. 말없이 술잔만 오갈 뿐이다.


"...중간에 끼어들 타이밍을 모르겠어서 듣고만 있었다. 어렵네. 사실 너한테 아이가 있고 그 엄마라면 L이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그게 가장 말이 되긴 하는데.. 이게 상황이 좀 그렇지가 않으니까.. 갑자기 딸이 있다고 해서 어디서 사고 친 줄 알았지, 그래도 내가 너 어떻게 살아왔는지 좀 알고 있지 않냐. 알고 있으니까, 아.. 뭐 이러냐.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너 막판에는 거의 남처럼 지냈잖아? 내 눈엔 같은 집에 사는 게 좀 신기할 정도였어."


9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었다.

K는 그날로 기억한다. 지난, 그리고 그 지난해의 같은 날과 온도차가 확연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근처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겨 술 까지 한잔 한 상태였다. 좋은 음식과 흥겨운 공간에 놓인 둘이었지만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가 앞에 있는 것처럼 저녁시간 내내 두 사람 모두 마음을 닫은 상태였다.


일을 끝내고 약속 장소로 오기로 한 L과 만나기까지 K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크리스마스 어드밴티지를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밖에서 저녁을 함께 먹자는 L의 말과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으로 외출을 결정했다. 좀처럼 흥이 나질 않고 저물어 가는 해과 함께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가운데 종일 K를 뒤덮고 있던 것은 온통 어둑한 것들이었다. 우울했다. 폭발하고 타 없어진다면 모두 해소될 것들이었을까, L의 화장대에 진열되어 있는 액자속 치아가 다 드러나게 활짝 웃고 있는 서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K는 순간 이 우울감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웃음과 저렇게 행복으로 범벅된 우리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밖의 노을이 군불을 지펴주고 심장 박동도 그 비트가 증폭되며 샤워를 하는 동안 L이 약속 장소에 도착해 환하게 웃고 자신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화답하며 얼어붙은 강이 봄기운에 해빙되는 순간을 그리기까지 했다. 이제 무엇을 먹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 앞에서 오늘 저녁 7시 즈음 자신 앞에 나타날 L을 향해지어 보일 미소도 연습해봤다. 진짜 웃음을 짓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읊조려봤다. L이 사준 짙은 블루 컬러의 남방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것과 어울릴 나머지 옷가지 들로 착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구겨신던 스티커즈를 외면해봤다. 조금 미리 가서 L의 도착 시간에 맞춰 음식들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에 움직임에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청담 사거리 부근에 위치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키스 자렛의 연주가 흘러나오고 빈자리는 거의 없었지만 웅성이지 않는 장내와 어둑한 조명까지 K를 차분하게 맞아주었다. 곧 도착할 L을 위해 와인을 먼저 주문하고 싶었다. L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5분 정도 있다가 다시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약속한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메뉴판과 와인 리스트를 번갈아 둘러보던 K는 7시 15분이 지나서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자렛의 피아노 터치가 강도를 더해가고 빨라졌다. 그것들이 온전히  K에게로 스며들어 그의 맥박도 빨라진다. 원래 볼륨이 이렇게 컸던가. 여기 모인 이들이 다 이렇게 들떠 있었던가. 베이스현을 긁어 튕겨내는 마찰음과 잘게 부딪히는 피아노현들이 눈에 보이는 듯 꿈틀거리고 K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거실 안을 서성이거나 책을 읽을 때에 늘 행복감을 주던 자렛의 피아노가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Body And Soul'의 마지막 그 뾰족한 음절이 작은 수조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져 퍼지는 것처럼 허공에 흩어져갈 때 L에게 전화가 왔다.

출발이 늦어져 15분 정도 후에 도착한다는 얘기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 얘기했다.


한 양동이 가득 짊어지고 온  뜨거운 물로 언 강을 녹이려 했다니. 부질없는 시도였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이부은 물만큼 얼음은 더 커지겠지. K는 등불 하나 없는 빙판 위에 서 있었다. 합을 맞추지 않은 작전의 성공을 위해 애를 썼다. 잘못된 노력이라 체념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이 치르기 실은 방어전이고 미뤄놓은 숙제였다는 걸 다시 한번 자각했다. L에게 그냥 집에 있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에게도 오늘이 그저 회피하고 싶은 하루였을지 모른다. 누가 이 매치를 성사시켰을까. 왜 그만두지 못하는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L은 왜 자신을 떠나보내지 않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리는 일행이 맞을까.


건조하고 냉랭한 그 자리가 숨 막히던 K는 그만 집에 가자고 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밤, 자신만을 제외한 온 세상이 이 밤을 아름답다고 찬양하고 있었다. 그래서 K는 그곳에서 도망쳐 숨고 싶었다. 돌아오는 L의 차 안에서 그녀는 누군가와 내내 통화를 했다. 막상 둘이 나눌 대화도 없었음에도 K는 끊어지지 않는 대화와 건너편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주차를 하고 대리기사가 돌아간 후 K는 다 늦은 밤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하냐는 식으로 L을 나무랐다. 그것도 사람을 옆에 두고. 그 말을 해놓고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통화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L도 평소보다 날 선 반응으로 응수했다.


"얘기가 계속 이어지잖아. 그리고, 전화 끊으면 어떻게 되는데? 노래라도 불러줄 거였어?"


애초에 되지도 않는 시비를 걸었기에 본전도 못 찾은 K가 흘린 쓰레기를 주워 담지도 않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 침대 안으로 숨어들었다. 


 '저녁이라도 먹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난 더 확실히 마음을 정했을 텐데, 오늘이 사랑으로 가득 찬 날이었다 해도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는 왜 나와 오늘을 보내려 했던 거야.'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L이 K 옆에 누웠다.

호텔이며 모텔방이 남아나지 않는 연인들의 밤, 선택받은 어떤 이들이 둘만의 공간을 허락받은 것에 안도하고 행복해하며 그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 속에 박제할 것이다. 한 집에 살았지만 동이 틀 때쯤 거실 소파에서 잠드는 K와 침실에서 자고 아침엔 출근하는 L이었다. 그 무렵의 그들에겐 일상 자체에 시차가 존재했고 그 간극은 갈수록 벌어져갔다.

그런데 L이 K 등 뒤로 살며시 다가와 그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L의 손은 곧바로 K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 그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냉동고 같은 가슴으로 굳어 있던 K가 그 손길에 순응하며 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K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하다.

하지만 답을 내리기 전 L을 향해 몸을 돌리고 둘의 입술이 거칠게 포개진다. 그 촉감과 향기가 주는 따듯한 위로에 빈틈없이 얼어 있던 강이 녹아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버튼이 눌러지고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K가 거칠게 L의 옷을 벗겨내고 이내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은 채 서로에게 몰두해 있었다.

 

"아까 미안해.."


L은 아무 말 없이 한 마리 뱀처럼 K를 타고 올라온다. 이렇게 관능적이고 요염한 L을 본 적이 있었나.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지만 냉정이 또렷이 유지되고 있는 두 남녀가 하나가 된다. 사랑을 나눈다. 수 없이 나눠온, 몸이 기억하는 습관 때문 일까 명분이 찾아지지 못한 텅 빈 섹스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안에다 해줘."


L은 피임을 해왔고 K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해왔었다. 조심하라는 말이 어울렸을 그날 L은 망설임이 없었다. L의 갈비뼈에서 소리가 날 만큼 거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풀어헤쳐진 K는 한순간 본능에 산채로 먹혀버린 자신에게 낙담했다. 이 처참한 가슴이 보란 듯 발기하고 허우적거렸다. 무엇보다 L이 왜 자신에게 안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한 침대에서 마주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관계가 소원해지고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일은 뜸 해지고 그렇기에 둘 사이는 더 악화 되어갔다. L 역시도 몸의 유희가 그리웠던 것일까. 하필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린 이 밤에?


침대 위에서 L은 수동적이었다. 단 한 번도 K를 밀어낸 적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달아 올라 그 문을 먼저 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 그녀가 이 잔인하게 얼어붙은 강바닥에 구멍을 낸다.


아이는 그날 만들어졌다.

예수가 세상에 오고 있는 그 밤에 끊어져가는 선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엄마, 아빠로 부터 '민아'가 오고 있었다.


뒤엉켜 있던 몸이 풀어지고 L은 차가운 실크 이불이 바닥으로 흘러내리 듯 침대를 벗어났다. 엄마의 태중에 감싸여 있다 세상에 처음 나온 태아처럼 K가 발가벗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심장박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춥고 허전했다. 그 맛도 모르는 담배 생각이 났다. 이래서 섹스 후에 담배를 피우는가 생각했다. 순식간에 빠져나간 영혼을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한 거겠거니.


K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기는 내가 있어야 돼."

"우리 착한 자기. 맞아, 나는 네가 있어야 돼."

"안 착해. 못됐어 나, 이기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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