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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Oct 28. 2021

<청담동 물고기> #5

J에게 물었다.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휴대폰 배경 화면을 보니 J 였다. 언제부턴가 휴대폰 배경 화면의 알림에서 메시지의 내용이 보이지 않게 설정해둔 K였다.

잠금을 풀고 내용을 확인한다.


'주말에 뭐 함?'


'민아 만남'


'아, 안부 인사 전해 줘~삼촌이 사랑한다고'


'너 부담스럽대'


'진짜? 무슨 소리야, 너한테 뭔 일 생기면 내가 대부하기로 했는데'


'니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니까 믿음이 안 가나 보지'


'잘해라 우리 사이 멀어지지 않게'


'내 딸이야 새꺄'


'이거 얼굴을 통 못 보네 너 주중에 일하고 주말은 딸램 만나고'


'응 일주일에 하루도 안 쉬는 기분ㅠ 너도 바쁘잖아 채널 구독자 많이 늘었드만'


'응 자리 잡아가고 있지, 술 생각은 있고?'


'그거야 매일 있지'


고용주로부터 '퇴근'이라고 간결한 메시지가 도착하면 K의 일과가 끝난다.

그 시각은 일정치 않다. 보통 오후 6시를 전후로 이루어지지만 어떤 날은 오후 4시에 심지어 오후 3시에 획기적인 퇴근을 명 받기도 했다. 그러다 하루는 밤 10시가 지나서까지 아무 조치가 없던 날이 있었는데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K가 조심스레 처분을 바라며 메시지로 일정을 확인하자 잠시 후 '퇴근'이라고 건조한 알림이 도착했다. 곧바로 K가 이미 퇴근한 줄 알았다고 덧붙였다. 물론 하염없이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오늘 일찍 끝나면 한잔 하던지, 미리 장소 정해'


'오케이! 뭐에다가 먹을래?'


'비싼거 니가 사 맵고 비싼거!'


'비싼거중에 매운게 어딨어 새꺄 비싼건 대부분 입에 쫙 달라붙지 않는 맛이라고'


'일단 얼큰 & 매운 거'


'콜'


이후 몇 분간 더 오랜 친구 J와 만남의 중심을 잡아줄 음식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어떤 요리를 곁들여 술을 마시느냐를 두고 꽤 시간을 들여 결론에 도달한다. 적당한 안주가 아니라 좋은 음식을 멤버로 영입하는 것이 그 시간과 자리에 예를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고교 동창인 J는 K의 사정을 대부분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다.


오늘은 친구와 한잔 해도 된다는 것인지 고용주에게서 평소보다 이른 퇴근 콜을 받았다. K는 오피스텔에 차를 옮겨 놓고 지하철을 이용해 약속 장소인 을지로 3가로 향했다. 무척 오랜만에 타본 지하철이었다. 고용된 후 차량을 지급받고 지근거리에 직장이 있고, 주말에는 딸아이와 역시 자차로 이동하기에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대중교통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퇴근시간대라 무척 붐볐고 객실 내의 사람들과의 과도한 밀착이 불편했다. 러시아워의 혼잡은 당연한 것임을 사십 평생 학습해 왔건만 불과 1년여 만에 마치 전용 기사만 부려온 부잣집 도련님 같은 까탈스러움으로 그들을 경계했다. 그간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의아했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되어 자기만의 영역을 유영하는 아늑함에 익숙해진 때문일까 한정된 공간의 이종의 존재들에게 적대감이 치밀어 올랐다. 다음에는 J를 강남으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충무로역에서 한 무리의 인파가 내리기까지 출입구 한쪽에 자리를 잡고 내리깔 듯 열차 내 사람들을 관찰하던 K는 이미 충분히 그들이 싫었고 철저히 자신과 분리시키고 있었다. 수조 안 열댓 마리의 물고기들 중 한 마리가 구석에서 턱을 괴고 나머지를 멋대로 판단하는 가소로운 모습이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친밀감을 모조리 상실한 것처럼 잔뜩 곤두선 채 다가올 의도가 없는 이들을 먼저 밀어내고 있었다.


인간은 어떤 결핍의 상태에 가장 취약할까.

그것은 고독일 것이다.

어떤 이가 스스로 삶을 끝냈다면 그 살생의 죄는 고독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K는 L과의 이별, 그리고 이혼 후 혼자 남겨진 고독으로 곪아 갔다. 이유 없이 숨이 가빠지는 그 공포를 여러 밤 감내해 왔다.

너무 화가 나 온 세상과 싸우고 싶고 술에 취해 18층 오피스텔 창밖으로 몸을 던져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한 그 밤, 처연했던 몸부림의 실체는 고독일 것이다.

외로워서 사랑을 하고 외로워서 음악을 했다. 외로워서 자신을 방치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문제를 찾고 만들어냈다.

 

적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둘러본 열차 내의 승객들이 예외 없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자신들의 휴대폰만을 바라보는 그 정적이고 획일된 모습이 K를 자극했다.


'패배자처럼 움츠린 벌레들, 음악을 듣던지 책이라도 읽으라고 이 멍청한 것들아! 아니면 잠을 청해서 피로라도 회복해!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너희들 인생이 그깟 손바닥만 한 화면에 함몰되어가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이 개돼지 같은 한심한 XX!"


너저분한 감정의 배설물들이 옳게 정화되고 씻겨지지 못한 채 K안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한편에서 "너 선을 넘고 있어. 진정하라고. 이럴 필요 없잖아. 여기 모두 있어야 할 곳을 향해 이동 중일뿐이야. 너도 모처럼 친구와 기분 좋게 한잔 하러 가는 중이잖아." 독을 뿜어내고 있는 자신을 향해 균형을 찾고자 하는 스스로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러면서 무언가 머릿속을 스쳐가고 포털사이트를 열어 그 내용을 검색을 하려던 중 K는 손에 들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여태껏 독화살을 쏘아댄 대상의 행태를 그대로 실행할 수는 없다는 마음에서였다. 아무도 의식하고 재단하지 않는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었다.

을지로 3가 역에 하차하고 출구로 나가는 동안에도 K의 휴대폰은 그의 손에 포박된 상태였다.


"누구 죽이러 가는 줄 알았다. 아주 그냥 성큼성큼."


출구 지상 부근에 다다를 때쯤 J가 뒤에서 말을 붙였다.


뒤돌아 J를 확인하고 


"아..! 왔냐, 그거 먹을 생각에 마음이 급했나..? 배도 고파오고.."


K를 휘감고 있던 잔뜩 엉킨 기운이 흩어져 간다.


"자리 있을까 모르겠네. 저녁시간 딱 겹치는구만."


"기다려서라도 먹겠어. 강까지 건너왔는데."


둘은 랑데부와 동시에 빠른 걸음으로 을지로 맛집에 도착했다. 여기선 감자국이라 부르는 뼈다귀 해장국과 먹음직스럽게 썰려 나온 순대, 머리 고기를 알현할 수 있다. 초저녁에 들르지 않으면 줄 서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이미 식당 안은 분주하고 몇 그룹이 줄을 서 있어 낭패라 여기고 있는데 다행히 2층에 두 사람이 앉을자리가 남아 있었다. 횡재한 심정으로 올라가 보니 왜 비어있는지 납득이 될 만한 협소한 자리였다. 옆 테이블과의 밀착된 거리도 거슬리는 부분이었지만 줄을 서서 남들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착석을 했다. 고민 없이 대표 메뉴를 주문하고 얼마 있지 않아 테이블에 놓인 얼큰한 국물과 머리 고기 한 점을 입속에 넣었을 때에는 그 후줄근한 좌석은 합리적 선택이 되었다.

왼편 자리 노인들의 고성과 욕설이 큰 힘 들이지 않고 K와 J 쪽으로 흘러들었다. K가 예민하게 의식하자 J가 신경 쓰지 말라고 눈짓을 주며 잔을 채웠다.


"저렇게 안 늙었으면 좋겠어."


"아 왜, 건강하시잖아. 우린 안 그럴 거 같냐."


하긴 이미 20대에 세상을 다 알고 모든 게 시시하다는 듯 무게를 잡았더랬다. 그게 아닌 걸 알게 된 지금이지만 세명이 함께 앉아 별 대화 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다 이따금 술잔을 기울일 때만 교류가 형성되는 다른 한 편의 젊은 여성들이 시원찮아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K는 지금 그냥 온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 집 머리고기가 늘 좋았다.

딸 민아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날, 그날도 이곳으로 J를 호출했었다.

두 모녀를 보내고 돌아오던 햇살이 충분한 오후였다.


"나 딸이 있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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