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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Oct 21. 2021

<청담동 물고기> #4

L

                                                                        



10월 중순의 가을 아침, 유튜브로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에서 주말에 한파 주의보가 내려질 거라는 얘기가 들렸다 지난주까지 반팔 차림이 자연스러웠는데 한파가 웬 말인가.

이제 가을은 내민 손을 쉽게 뿌리치고 돌아서는 야속한 정인이 된듯하다.

몇 가지 상념 속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더니 이내 우산 없이는 걷기 불편할 정도로 아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저녁부터 민아를 만나 모녀의 집에서 주말을 함께 보낼 것이다.

L은 오히려 주말에 용무가 많아 K가 민아를 데리고 근교로 캠핑을 가거나 가까운 한강 유원지에 가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L의 얘기로는 민아가 엄마보다 아빠 말을 더 잘 듣는다고 했다. K에게는 반가운 소리였지만 엄마와는 부딪힐 것이 많은 주중의 일상을 함께하고 자신과는 매주말 휴가를 보내는 기분이라 그렇겠거니 하면서 한편으로 버거운 부분은 모두 L이 감당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연애시절과 결혼 생활도 줄곧 그런 기조로 흘러 왔었다.


홍대 인디씬에서 수준급 연주자로 평가받으며 소속되어 있던 밴드까지 주목받는, 여러 지점에서 빛나는 K를 볼 수 있던 때가 있었다.

밴드 혹은 기타리스트로서 자신을 향한 인터뷰 제안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 중 한 현장에서 담당 에디터로 나타난 'L'을 처음 만났다.


그때도 10월의 가을이었다.

L은 인터뷰 장소였던 홍대 인근 카페에 약속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영상으로 노출되어 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인디 밴드였고 출연했던 몇몇 방송의 경우 프런트맨 인 보컬이 대표로 말을 했기 때문에 클럽 공연에서 접했던 살짝 처져 서글퍼 보이는 눈으로 간간히 객석을 바라보며 기타 선율을 흘려보내는 모습만이 K에 대한 L의 이미지였다.


약속 시간을 10분 정도 남겨뒀을 즈음 카페 문이 열리고 K가 안으로 들어왔다. 앉을 곳을 찾는 K에게 손짓하자 그가 미소 지으며 L을 향해 거침없고 투박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앞에 털썩 않는 K의 몸짓과 속도는 새로운 인물이 무대 등장한 듯 그 안의 공기를 환기시켰고 L에게는 인생의 한 챕터가 넘겨졌다.


K가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네기도 전,

L은 ' 나는 이 남자의 아내가 되겠구나'라는 명확한 신호를 느꼈었다고 훗날 K에게 말했다.


K는 L을 향해 그런 운명적 암시까지는 받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L은 자기가 먼저 반한 것이 억울하다며 남들에게는 자신이 K의 첫사랑이라고 말하고 다닐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구김 없고 상냥한 L과의 사랑으로 K는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 안녕하세요. K라고 합니다. "


"네, 안녕하세요. 이번 기획 기사 진행하는 L이에요."


건네받은 명함에는 에디터 L이라고 쓰여 있다.


"많이 일찍 오셨나 봐요. 저는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싫어해서 조금 서둘러 오는 편인데."


L이 놀랐던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30대 초반 나이보다 앳된 얼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굵고 낮은 음성이었고 의식해서 목소리를 깔아내는 것이 아닌 소리의 밀도가 참 건강하게 채워져 있는 K의 목소리.


"아.. 네, 사실 시간 약속 잘 지키는 편은 아닌데 일할 때는 신경 써야죠."


L의 답에 싱긋 웃고는 카페 안을 둘러보며


"감사합니다. 여기 마음에 드는데요? 조용히 얘기하기 좋은 곳 같아요. 제가 홍대에 살지는 않아서 막상 좋은 데를 잘 몰라요. 술집은 좀 알지만."


"술 좋아하시나 봐요?"


"네,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술 마시는 거 좋아해요. 그래서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오래 술 먹게.."


그러면서 메뉴에 주류가 있는지 찾는 눈치였지만 생각이 바뀌었는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인터뷰가 시작되면서 들려져 오는 K의 음성은

하나의 음악처럼 L의 귀를 자극했고 그녀로 하여금 문장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단어에 이어 새로운 음절의 시작을 기다리게 했다.

그가 기타를 내려놓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 목소리로 그의 멜로디를 연주해 주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을 반 이상 뺀 듯한 이완감에 툭툭 내뱉는 말투가 신선했다.


K는 털털하게 때로는 짓궂은 농담도 던져가며 대화를 이끌어 갔다.

기타리스트로서 그리고 밴드의 일원으로서 그의 철학과 신념 같은 것을 무겁지 않게 그러나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L은 음악이 태동되는 감성이 따로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자기 앞에서 그가 발산하고 있는 에너지와 그 색채는 이 남자를 마주하기 전 제공된 정보와 확연한 거리가 있었다.


그러면서 밴드가 아닌 혼자만의 작업으로 그의 음악이 만들어진다면 지금 내 앞에서 풍기고 있는 이 고유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길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애주가이고 예쁜 여자랑 술 마시는 게 좋다고 말하는 이 남자, 술과 아름다운 여자는 음악을 샘솟게 하는 원천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공적으로 처음 만나는 여성에게 제법 불량스럽게 들릴 만한 발언이 위트 있는 말투와 선을 넘지 않는 수위 속에 무엇보다 멋진 그의 목소리에 담겨 나오면서 L은 불편함이 전혀 없이 그 대화 속에 안착해 있었다.


시간의 중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가을 해가 져갈 때쯤 공식적인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면서도 두 남녀의 주변을 부유하던 감정들은 흩어지지 않고 K에게 선수를 맡겼다.


 "저녁이나 같이 먹죠? 아..! 선약 없으시면.."


그 초저녁의 공기처럼 시원하게 웃으며 2차로 가고 싶은 이자카야가 있다고 L이 답했다.


"2차는 제가 살게요!"


K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오호, 그러면 저녁은 대충 먹고 그 이자카야 가서 비싼 거 많이 먹읍시다!"


K가 왜 좋았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나를 많이 웃게 하는 사람'이라고 L은 답했다.


당시를 K는 이렇게 떠올린다.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에게 들어간다. 우리 둘이 하나가 되는 것에 어떠한 마찰도 느껴지지 않는다. 온 우주로부터 단 1%의 저항도 없이 시작된,

그렇다. 모든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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