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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Oct 14. 2021

<청담동 물고기> #3

맑은 해 같은 민아




K는 이혼을 했다.

2년도 되지 못한 짧은 결혼 생활이었다.

전처가 키우고 있는 딸아이도 하나 있다.


'민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5년 전이었다.

K가 음악을 하던 시절 교제하고 동거했던 여자 친구가 이별 후 3년이 지나서 K에게 연락을 해왔다.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K에게 핏줄이 당기는 극적인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면에 켜켜이 쌓여 혼재해 있는 기억의 구석진 곳에 '네 딸이야'라고 적혀 있었다.


옛 연인 L은

"인사해, 당신 딸이야."라고 담백하게 말하며 이름이 '민아'라고 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기도 하고 하룻밤 스쳐간 여자가 자신 앞에 웬 아이를 안고 나타난 것도 아니었으니 그를 뒤흔들 만한 혼란은 없었다. 무엇보다 처음 본 그 아이가 그냥 좋았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아빠가 되는 것도 수차례 떠올려 본 것들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이루어진 그 설익은 숙원의 실체가 연약하게 다가오기는 했다.

살아 움직이며 자신의 딸이라 소개된 아이를 보면서도 말이다.


엄마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중간중간 K와 시선이 마주치는 민아의 눈을 보고 있자니 비교적 차분했던 초반과 달리 계속 폭발해서 뻗어 나아가는 우주가 K의 가슴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무언가를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였고 평소대로 납득할만한 해결책으로 차근히 이 상황을 풀어내고 싶었으나 계속 부서지고 흩어져만 가는 생각들을 부여잡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이가 앞에 있었기에 직설적으로 L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숨겨왔던 민아의 존재를 지금 이 시점에 나에게 알리는 것은 L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고 그 결정에 충분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두 문장의 대화가 이어지고 K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 안녕.."이라고 옅은 미소로 답한 뒤 말을 더 잇지는 못했다.

'나는 네 아빠야!'라고 뒤이어 어처구니없는 첨언을 했어야 했나, 호탕하게 웃으며 별 내색을 안 했다면 그 자리가 한결 매끄러웠을까, 그 어떤 물음에도 쉬이 답을 내지 못하는, 마치 총알 한 발이 머리를 뚫고 지나가 사고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이내 털썩 쓰러지며 모든 바이탈이 멈춘 느낌였다.


밝게 연기라도 해서 더 반갑게 그 아이를 맞아 주었어야 했고 그 자리를 유연하게 이끌어서 태어나 처음 아빠를 만나는 자신의 딸에게 더 근사한 기억을 남겨 줘야 했었는데 나는 왜 그리 궁색했던가 하는 회한이 그날 이후 얼마간 K를 괴롭혔다.


"민아 너무 예쁘다."라고 말했던 것만 분명하게 기억한다.


갑자기 자기 인생에 나타난 혈육으로 인해 복잡한 심경도 있었지만 몇 년 만에 만난 옛 연인이자 전처이며 이제는 자기 아이의 엄마가 된 L과의 재회도 K가 풀어가야 할 숙제였다.

아빠는 바빠서 먼저 가 봐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민아는 K를 얼마간 응시했다.


웃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가 태어나 처음 아빠라는 사람을 만난 날, 자기 속이 어떨지 가늠도 못할 이 시원찮은 아빠를 향해 아이방을 정리해주는 보호자처럼 차분히 상황을 마주하며 마치 당신들에게 어떠한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괜찮으니 아빠도 진정하라는 듯 웃어 주고 있었다.


맑은 해 같았다.


눈 부시게 화창 하지도 강렬함에 피부가 쓰리 지도 않은, 종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투명하고 보드라운 빛.


L의 차까지 모녀를 배웅하며 인사를 건네는 순간,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며 K를 바라보는 민아의 얼굴엔 여전히 맑은 해가 떠 있었다.


그리다 만 데칼코마니같이 요상했던 하루의 끝, 침대에 누워 생각해보니 곧 민아와 시간을 보낼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져 나는 여기에 누워있고 내 세상 모두를 줘도 모자랐던 한 여자와 아이는 나와 다른 밤을 보내고 있게 된 것인지, 그 균열의 시점을 반복되는 연상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어찌 된 영문인지 늘 너그럽지 않았던 잠이 오늘 밤은 금세 그 곁을 허락해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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