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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Sep 30. 2021

<청담동 물고기> #1

연재소설 <청담동 물고기> 프롤로그

                                         

                                                                   



'수조 안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벽 앞에 멈춰서, 검푸른 물결 넘어 빼앗긴 바다를 바라본다.'


어항 속 푸른 물고기 한 마리가 유영을 그만두고 그 시선을 창 밖으로 두고 있다.

K는 그의 소유물 중 지분이 미미한 저 작은 수조 속 생물에게, 동거한 지 수개월이 지나 출근 시각이 다가오는 그때에야 처음 눈길을 건넸다.


지인의 후배가 사업을 접으며 재고를 정리하는 가운데 K에게로 온 수조와 물고기였다.

이름도 지어지지 못한 채 한가닥 로맨스도 없는 반려자.


"간다."

처음 건넨 인사였건만 그 푸른 생물은 돌아보지 않는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오피스텔에 거주하며 지급받은 차량으로 통근하는 K는 엔진이 채 데워지기도 전 그의 고용주의 자택에 도착한다. 전임자로부터 인수받은 근무 지침에 따라 메시지로 출근 상황을 보고 하고 별도의 지시와 일정이 있기 전까지 대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K의 청담동 유영이 시작된다.


K는 운전을 한다.

중견 사업가의 수행 기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K의 고용주는 보통 오후가 한참 지나서 일과를 시작하거나 잔심부름 몇 가지를 시키고는 집 밖을 나서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건강의 문제인지, 업무의 특성인지 여러 의문이 들지만 그의 비일상적 스토리를 완성할 만한 퍼즐 조각이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그 배우자나 딸아이를 픽업하는 일이 더 잦은데 이 또한 그리 빈번하지 않다.

결국 노동력은 거의 제공하지 않고 그의 육체와 시간을 담보 잡힌 채 대부분의 일과를 청담동에서 소비하는 것이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 그러나 자신의 물고기처럼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십여분을 넘기지 못하는 그 작은 '청담항'을 벗어날 수도 없다.


이 생활이 나쁘지 않다.

고용주도 그에게 호의적이고 급여 또한 적정하다.

그리고 단정하게 정돈된 이곳 청담동이 마음에 든다. 유명 연예 기획사가 있던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고 그 골목의 시그니처인 도넛 가게는 여전히 주홍 빛깔을 발하고 있다.


K는 걷는 것이 좋다.

산책은 그를 너그럽게 한다. 살아봄직 하다고 여겨진다. 기분이 한껏 좋은 날엔 어떤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맴돌기까지 한다.

골목을 지나 대로에 들어서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반대편에서 경쾌한 꼬릿 짓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무리의 물고기 떼와 조우한다. 그것에 역행해 도착한 블록 끝의 교차로가 K의 심리적 한계선이며 이곳에 이를 때 즈음이면, 이어오던 허밍의 그 비트와 멜로디가 부쩍 초라해져 있다.


유리벽에 충돌하기 직전 돌아서는 물고기처럼 그 몇 걸음을 더 진행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공기 중에서 헐떡이는 물고기처럼 K에게는 불쑥 날아들지 모를 고용주의 부름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이 경계선 까지가 호흡이 가능한 물 속인 것이다.

  

그날도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두고 걷다가 고용주의 자택 근처에 다다랐을 때 반대편에서 한 여자가 걸어오는 걸 봤다.

회색과 녹색이 뒤섞여 있는 머리 색깔, 작은 얼굴에 쓴 큰 안경 탓 인지 생김새는 잘 알 수 없었다.

체구가 크지 않은데 상의는 몸에 많이 붙는, 하의는 오버 사이즈에 위아래 모두 블랙톤으로 입고 있었고 그 착장이 세련되고 패셔너블한 모습이었다. 뭔가 알록달록한 사탕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K와의 거리가 좁혀져 가는 가운데 그녀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손짓을 했다.

손의 높이는 허리보다 조금 낮은 상태에서 팔을 들고 손바닥은 K를 향해 열려 있었다.

'아는 사람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진행 방향으로 계속 걷는 중에도 그녀의 동작은 유지 중이었다.


조건 반사였을까, 자신에게서도 그녀의 몸짓에 화답하는 동작이 실행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런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체 해주면 좋겠다고, 그러면 매일이 똑같은 이 어항 속에 예쁜 물고기 한 마리가 찾아와 준 듯 반가울 것 같았다.


서로 두어 걸음 좁혀지며 이제 생김새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리에 들어섰다.

호감을 가질 만한 귀여운 얼굴이었다.

안경과 흐트러진 머리 때문에 면식이 있는 사람인지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오른쪽 귀에 까만 피어싱까지 분명히 눈에 들어올만한 거리에 이르렀고 그 둘은 같은 몸짓으로 손을 내밀며 대칭을 이루어 마주 서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으려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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