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하고 평탄한 삶이었다. 대형마트에 몸 담기 전에는.
중학교에선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언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꽤나 이름 있는 인 서울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해선 과제에 치여 살다가도, 음주 가무와 여행을 사랑하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지냈다. 취준 생활도 길지 않았다.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대형마트의 관심 있던 직무에 공채 사원으로 당당히 입사했다. 그런데 웬걸, 나는 예상치 못하게 마트 지점 영업관리 사원으로 발령이 났다. 당장 그다음 주부터 마트 조끼를 입고는 서울 한복판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진열하게 되었다! 학생 때는 전혀 꿈꾸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내가 겪었고 앞으로도 겪어나갈 대형마트의 생존기, 그리고 대형마트 內 한 사원의 고군분투 일상을 풀어내보려 한다.
아주 가끔 마트 입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마트에서 무슨 일을 해요? 오늘은 입사하기 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트 업무들을 정리해볼 거다. 읽기 전에 명심할 점은 마트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이 글은 내가 속한 대형마트 내에서도 한 지점, 한 부서를 토대로 한다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1. 포스를 쳐요.
계산대에 들어간다. 우리는 보통 '포스(Pos)를 친다'라고 말하는데, 말 그대로 캐셔(Cashier) 업무를 한다. 정기적인 업무는 아니고 주말이나 저녁시간 때 사람이 몰릴 때마다 돈통을 들고 포스로 향한다. 처음 캐셔 업무를 배울 땐 멘붕 그 자체였다. 수많은 상품권 종류, 수표, 포인트 결제, 포인트 적립, 종이 할인 쿠폰 등등 결제 수단이 이렇게 많을 줄 누가 알았으랴. 또한 과일이나 야채를 가져오면 포스에서 직접 해당 과일을 선택해야 하는데, 처음 보는 과일은 왜 이렇게 많은지! 다다기오이와 취청오이는 똑같이 생겨서는 왜 가격이 다른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계산을 버벅댈 때마다 줄 서있던 고객님들의 따끔한 눈초리를 견뎌내며 나는 성장했다. 지금은 과장을 좀 보태서 눈 감고도 바코드를 찍고, 촉감으로도 무슨 과일인지 추측할 수 있다.
2. 까대기를 해요.
서문에서도 말했지만, 마트 매대에 물건을 진열한다. 전문용어(?)로 "까대기"라고 칭하는데, 박스를 까서 매대에 진열하는 단순한 작업이다. 대형마트는 돌을 진열해도 팔렸다는 호황기를 지나, 소셜커머스와 편의점 성장의 직격탄을 맞았다. 전년보다 올해의 실적이 안 좋고, 올해보다 내년의 실적이 안 좋을 예정이다. 예전만큼 많은 직원을 둘 수 없으니, 나와 같은 공채 사원들이 투입되어 열심히 까대기를 해야 한다. 옷과 신발은 최대한 아끼지 않는, 당장 내일 버려도 되는 것으로 착용한다. 어차피 박스에 묻은 먼지로 곳곳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멋 낼 필요도 없고, 진열에 기가 막힌 기술도 필요 없다. 가위와 칼만 주머니에 가 잘 넣어두고, 빨리 진열을 끝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3. 발주를 넣어요.
발주, 즉 상품이 우리점에 들어오도록 주문한다. 본사에서 넣어주는 상품도 있고 재고가 없으면 시스템 상 자동으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상품은 우리가 직접 주문해야 한다. 회사 발주창을 열고, 상품별로 몇 박스씩 넣을지 수량을 입력하면 끝이다. 이 발주 행위의 치명적인 단점은 마감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오전 내에 모든 발주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내가 쉬는 날이던 오후 출근이던 상관이 없다. (아, 우리는 주말 휴무, 오전 출근이 아니다. 일주일에 평일 포함 2일 휴무에 오전, 오후 출근을 번갈아 한다.) 아침마다 일어나 발주창을 켜는 건 이제 하루 일과, 마치 양치하는 것과도 같다. 나는 누구나 한 번쯤 다짐하는 아침형 인간으로 살고 있다.
4. 고객의 소리(대부분 클레임)를 들어요.
가장 어렵고도 힘든 업무인 고객 클레임(Claim)을 처리해야 한다. 일차적으로 고객센터에서 응대를 하지만, 고객님이 강성일 경우 우리를 부른다. 물론 우리점의 실수인 경우도 많다. 가격 고지가 잘못되어 있다거나, 직원이 불친절하게 응대했다거나 등등. 우리의 잘못이 명백할 경우 두말할 것도 없이 사과드리고, 불만족스러웠던 쇼핑의 보상을 위해 노력한다. 그. 러. 나 정말 난감한 요구 사항을 직면할 때도 많다. 구매한지 한 달이 넘어 유통기한이 다 된 식품의 환불 건 같은 건 애교 수준인 정도. 내 선에서 끝나지 않으면 그 윗선, 그 윗선의 윗선을 불러야 하기에 부담감은 가중되고 감정 소비도 심하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 온실 속 화초로 자라왔다는 걸 새삼 깨달을 때가 많다.
이것보다 힘든 일도, 쉬운 일도, 재밌는 일도 많지만 입사 전엔 예상하지 못했던 업무만 추려봤다. 처음엔 내가 생각했던 회사 생활이 아니라 울기도 많이 울었다.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에 사원증 메고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든 삶을 생각했지, 마트 조끼 차림에 무전기 메고 박스 든 삶을 꿈꿨으랴.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 업무를 통해 크게 성장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위의 단순하다면 단순한 업무와 더불어 협력업체 사원과의 치열한 머리싸움, 매출 상승을 위한 다양한 시도 등 마트의 업무 범위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나는 이런 업무도, 저런 업무도 하며 마트에 물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