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질의 잠을 사고파는 시대.
출근길, 만원 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반쯤 뜬 눈으로 스마트폰을 열어 SNS를 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슥슥 피드를 내리던 엄지손가락이 갑작스레 멈췄다.
흔한 일은 아니다.
나에게 SNS를 열어 보는 것은 반 이상 습관적인 일이기에 빠르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칫하는 일은 드물다. (너무 예쁘거나 귀엽거나, 너무 맛있어 보이는 뭔가를 발견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선을 강탈한 그것은 다름 아닌 광고였다.
'1알 먹으면 10시간 잔 듯 개운함'
'품절 대란으로 얼마 전 재입고됨. 효과 보증.'
!!!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야? 사실이면 대박인데.
늘 잔 듯 만 듯 어정쩡한 수면을 취하는 나에게 저 카피는 꽤나 구미가 당겼다.
사진엔 언뜻 영양제로 보이는 플라스틱제 통이 있었고 그 뒤로는 늦은 밤 잠 못 드는 누군가가 괴로움에 얼굴을 감싸고 있는 사진이 겹쳐있었다. 나도 아는 괴로움, 불면의 고통을 겪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영양제처럼 한 알만 먹으면 3시간을 자도 6시간 잔 것처럼 개운하고 게다가 품절 대란이라니.
진짜 효과가 있는 걸까?
그보다도 품절 대란을 일으킬 만큼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묘한 동질감이 들면서도 돈을 주고 잠을 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필자는 대학시절 휴학을 하면서부터 엄습한 불면증에 몇 달간 시달린 적이 있다.
옛날 고문 중에 잠 안 재우는 고문이 있었다는데 그게 얼마나 잔인한 방법이었는지 몸소 체험해 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떠도, 낮 시간에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잘 시간만 되면 눈에서 광선 빔이 나올 정도로 말똥말똥해지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원인은 스테로이드 부작용과 그로 인해 생긴 피부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는데 당시 나의 온 얼굴은 피부염으로 뒤덮여 울긋불긋했고 밤마다 벌레 수백 마리가 얼굴을 기는 듯한 소양감에 더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처참한 몰골에 연극을 전공하던 나는 대인기피가 와 무대는 고사하고 사람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때 나에게 남은 것은 무기력하게 누워 침대와 함께 끝도 없는 축축한 지면 아래로 침몰하는 것 같은 절망감뿐이었다.
이후 6개월간 채식과 한약 음용을 병행하자 피부가 서서히 전 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수면제 없이도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마음속 불안이 걷히니 불면도 함께 걷혀 사라진 것이다.
그리도 지독하게 날 괴롭히던 불면이 피부가 낫자 자취를 감췄다. 대인기피가 사라진 건 덤이었다.
직장인이라는 명패를 달고 나니 잘 밤의 공상이나 감상, 걱정 따위로 잠 못 이루는 것은 사치가 됐다.
최대한 빨리 잠들어야 한다. 지금 자면 7시간 잘 수 있으니.
하지만 뭐 사람이 뜻대로만 되나, 걱정과 고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쌓여 가고, 당장 내일이 두려운 우리는 또다시 잠을 설친다. 혹은 회사에 매몰되어 나도 모르게 지나가 버린 오늘 하루에 대한 보상 심리로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내고 늦은 시간까지 ‘폰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충혈된 눈을 뜨고 현실을 부정하며 ‘5분만 더... 10분만 더...’라고 신음하기 일쑤다. 나 역시 회사 가기 위해 눈을 뜨는 아침마다 세상 모든 욕지거리를 다 갖다 박고 싶은 심정으로 일어나곤 한다.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지, 학창 시절 개근상 주며 칭찬했던 건 다 성실한 노예를 양성키 위한 완벽한 계획이었던 게 아닌지 하는 생각,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생각 아니던가.
그런데 이런 내 아침을 가뿐하게 만들어 준다고? 단 한 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사고 싶다.
링크를 클릭해 광고 속 제품의 가격을 봤다. 59,500원.
원가는 98,000원이지만 지금은 파격 세일을 하는 중이었다. 총 30알이 들어 있고 하루에 한 알을 먹는 거니까 한 달 치 가격이었다. 한 달 동안의 숙면이 거진 십만 원인 셈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것이 비싸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어제 여러분의 밤이 안녕했는지, 단잠을 잔 뒤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는지, 출근해서 방 안의 이불속이 간절해지진 않았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시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이 제품은 나름 대박 상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너무 많은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어 있고, 매일같이 방대한 양의 정보를 흡수해야 하며, 치열하게 경쟁해도 살아남기 힘든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꿀잠’을 잔다는 것은 이제 희소한 일이 됐다. 늘 그랬듯 희소성이 있는 존재는 경제재가 되고, 대가를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게 된다.
‘꿀잠 베개’ , ‘유튜브 ASMR 영상’ 등의 수요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제품의 출시는 현시대 우리들의 니즈(Needs)를 기민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다.
인간이 80년을 산다고 쳤을 때 26년을 자는 시간에 소비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이제 이런 말도 옛말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아닐까?
60%만 충전된 배터리는 금방 방전된다.
우리의 충전을 자꾸만 방해하는 게 뭔지, 뭐가 이리도 우릴 소모시키는지, 어쩌다 잠마저 사서 자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행복의 본질이 어디에서 오는지 인류적인 차원에서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