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셀프
이번이 두 번째이다. 오후 햇볕이 좋은 가을날 그와 함께 점을 보러 갔다. 몇 해전 결혼을 앞두고도 사주나 궁합은 보지 않았다. 상견례 자리에서 양가 부모님의 일정이 있는 주말들을 빼고 예식장의 달력을 테트리스처럼 맞춰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만들어졌다. 새해가 되어도 살뜰하게 한 해의 운세를 챙겨보지는 않는다. 가끔 부모님이 일러주시는 ‘~ 조심해라’등은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와 함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나도 모르는 내 앞날을 누군가 알고 있는 것도 억울하고, 눈을 반짝이며 의뭉스럽게 물어보는 것도 양심에 내키지 않아 좀처럼 발길을 두기 어려운 곳이 점집이다.
첫 점집은 십여 년 전, 직장 상사의 권유였다. 사실 궁금한 것도 물어볼 것도 딱히 없었지만 한 번만 가보라는 말에 업무처럼 신속하게 해치웠다. 서른을 넘기지 못했던 친구를 떠나보내고 빛이 꺼진 얼굴을 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런 나를 한참 지켜보다가 상사는 말했다. 꺼져가는 마음과 흩어지는 정신이 조금 나아질 것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에서의 마주했던 얼굴은 희미하고, 쏟아졌던 말들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다만 그 찰나 같던 시간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쉼표였다. 경계에 서 있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묘한 위로를 받고 마음을 툭툭 털어냈다. 물론 먼지처럼 털 수 있는 마음은 아니지만 적어도 뿌옇게 가려졌던 앞이 간신히 보이긴 했다. 어둡고 축축한 터널에서는 작은 빛이 비치는 곳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일어서서 다시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돌아보니 매 순간이 선택이다. 태어나는 것에도 어쩌면 내가 그들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니라, 내 가 그들을, 내가 이곳을. 이렇게 무수한 작은 선택들과 신중하거나 무모한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은 바둑처럼 누군가의 훈수가 필요할 때가 있다. 감정을 배제한 타인이면서 직업적으로 믿음직한 누군가의 훈수.
남편은 한동안 고민하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성격과 상황에 대해 우리들만큼 잘 읊어냈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의 직장생활에서의 그의 상황, 앞으로의 방향까지. 역시 용한 점쟁이였다. 미적지근하지도 않고 분명한 태도로 답을 주었다. 돌아서며 물어보니, 그는 ‘그 용한 답’을 따를 것 같지 않다. 결국 인간은 관성을 가지고 자기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길,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다만 누군가와 내 인생의 조각들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애써 답을 찾아보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보며 종료 휘슬을 앞둔 선수의 마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그녀의 말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가을만 되면 낙엽처럼 바람을 타는 마음을 가진 내가 물었다. 어쩌면 점쟁이는 듣고 싶은 답을 친절한 연인처럼 귓가에 속삭여주는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지만 듣고 싶은 마음의 말에 힘을 실어 보여주고 들려준다.
여름의 열기는 서늘한 가을바람에 밤처럼 차갑게 식었지만 보이지 않는 불안은 대문 밖에, 마스크 안과 밖에 그대로 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건지, 어떤 생각과 선택들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그럴듯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점 집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간절한 답을 구하는 순간처럼 나와 마주하고 싶다. 정답과 해설이 있는 문제집을 풀던 시절에도 문제집 밖의 세상은 혼돈과 좌절이었다. 생각해보니 인생에는 문제만 있고 내 답만 있지 살짝 넘겨볼 정답과 해설지는 없다. 간혹 오답과 정답 사이를 갈팡질팡하겠지만 내가 찾은 답들이 결국 나를 미로 밖으로 안내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정답지가 없어 오히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