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운명이다. 오직 언제 죽을지 모를 뿐이다. 당신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죽음의 시점에서 과거를 더듬어 당신의 전 생애를 돌아보라.
-잭콘 필드(Jack Kornfield)-
묘비명(墓碑銘)은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을 남긴 글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살아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이 죽어서도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묘비에 증표를 남기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억울하게 살다 갔노라고 적는 걸까? 세월이 흐르면 그 묘비명을 보는 사람은 무엇을 느낄까? 자신도 저 땅속에 백골이 되어 누워있는 사람처럼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올까? 자신은 억울하게 살다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올라올까? 그보다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별 없이 모두 죽는구나. 사람은 죽으면 똑같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구나. 최소한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지. 선(善)하게 살아야지, 후회하지 않게 살아야지……. 자신의 마음속에서 온갖 상념(想念)이 올라온다.
나이 50이 되면 ‘자신의 묘비명’ 쓰기를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늦기 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다. 50대는 모두 먹고살기 위해 바쁘게 달렸다. 남보다 좀 더 잘 살려고 애를 썼다. 처세술이라는 얄팍한 주문을 외우며 누구에게는 아양도 떨고 누구에게는 위세를 부렸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서기도 했다. 그렇게 잘난 자신도 언젠가 닥칠 또 다른 삶인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된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평등하다는 것을 그때 알아차린다. 살면서 그렇게 당당하고 위세를 떨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고 초라해진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나?’, ‘부질없는 짓을 많이 했구나.’, ‘살았을 때 찾아가서 손이라도 잡고 미안하다고 할걸.’ 죽음 앞에 무릎 꿇은 때에서야 알아차린다.
자신의 묘비명 쓰기는 자신의 삶의 ‘데드라인(dead line)’에 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이다. 나이 50이 되면 부모님이나 지인, 친구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소중한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직접 보면서 ‘나는 잘살고 있는가?’라고 되뇌기도 한다. 50이라는 나이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나이다. 자기 자신은 죽을 때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죽음을 앞두고 덜 후회할까? 자신이 아등바등 가지려고 했던 것이 죽음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가장 소중한 무엇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심상(心象)으로 자신의 삶의 끝, 더 이상의 삶이 허락되지 않는 지점에 서서 맑은 거울을 비춰본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착한 사람으로 살려고 했던 것도 후회된다. 괜찮은 사람 노릇을 한다고 얼마나 나를 억누르고 살았는가? 점잖은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얼마나 무시했던가? 하는 일이 바쁘다고 가장 가까운 사람인 배우자와 자식들 부모님, 형제, 친구를 소홀하게 대했다. 모두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그것도 자신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려도 이제는 기회가 없다. 그래서 아쉽고 안타까워서 절절히 후회한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 다가가지 않으면 후회한다. 언젠가 자신의 삶의 종착지인 죽음을 대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덜 후회하기 위해 자신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 세상의 누구에는 당장 일분일초가 아쉬울 것이다. 이다음, 내일이라는 시간은 없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만약 자신이 지금 죽음으로부터 얼마간의 삶의 시간을 허락받는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자기 자신의 묘비명 쓰기는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으로 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에 후회할 것을 지금 당장 하기 위해 자신의 과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자신은 완벽하지 못하다. 실수도 하고 후회할 일도 한다. 삶의 끝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 마음속에 꾹 눌러두고 풀지 못했던 일을 풀어내야 한다.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상대방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심리학 연구에서 ‘죽음에 대한 성찰(death reflrcting)’이 심리적 이득이 있다고 한다. 한 개인의 죽음 성찰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통합을 도와준다. 즉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내면의 갈등 상황을 일관성 있게 통찰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심상을 통한 임사체험 연구에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한 사람들은 고마움과 감사함의 상태를 더 많이 경험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 개인이 감사함의 상태를 더 많이 경험하면 그의 기분이 좋아지고, 장기적으로는 그의 주관적 웰빙이 증가된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성찰의 심리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예측할 수 없는 죽음(mortal limitation)’을 온전히 수용할 때다. 자신의 유한성을 직면하고, 자신의 예측할 수 없는 죽음에는 자신이 짊어진 모든 타이틀이 물거품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탐욕을 줄이고, 현재 삶에 감사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나이 50에 자기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보는 작업은 행운이다. 이 소중한 기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했는지 삶의 끝에서만 보인다. 자신이 바쁘게 살면서 놓친 중요한 것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자신의 삶의 끝에서 미리 보았던 아쉬움의 흔적을 지우고 충만함을 채울 기회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상상으로 경험하는 것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하기를 원하는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릴 기회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그런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선택과 행동이 분명해진다. 특히 자신이 시련을 겪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나이 50은 자신의 삶을 중간 점검할 적절한 시기다. 삶의 종착지점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지나온 과정을 돌아보는 시기다. 이후에는 자신의 삶을 수정할 시간이 없다. 하고 싶어도 기다려주지 않는 상황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후회할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50까지 살면서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소홀히 하고 채우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다. 이후에 자신의 삶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자기 내면의 나와 약속할 수 있다. 나이 60, 70, 80에 자신의 50을 돌아보면 그때가 자신에게는 기회였다고 말할 것이다. 삶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 번쯤 조용한 카페에서도 자신의 삶을 탐색할 수 있다. 긴장을 풀고, 모든 시름과 계획 다 내려놓고 눈을 살포시 감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절박함을 느낄 때 정신을 차린다. 절박함을 느낀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로소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자신의 현재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삶을 깊이 성찰할 수 있다. 평소에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고 할 때 시간의 단절, 절박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을 돌아보는 작업은 머리로 하는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자신의 묘비명 쓰기는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과 시간, 그리고 물리적 실체와 단절을 경험하게 한다. 자기 자신은 지금까지 시간의 단절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이어져 왔고 이후로도 한없이 이어지리라 믿고 있었다. 죽음은 자신과 시간, 물리적 세계가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이 세상에 머물다 가는 시간은 눈 깜짝할 정도의 짧은 순간이다. 하루살이의 삶과 다르지 않다. 이 짧은 시간에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우주 전체적인 고민과 짐을 안고 산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위에 서려고 숨을 헐떡거리며 달린다. 자신은 남들보다 돈, 권력, 명예, 지위, 학력, 재능, 체력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50년을 남들과 같이 달렸는데 눈에 보이는 자신의 성적은 초라하게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운 사람을 배신한 적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잘난 맛에 우쭐거렸을 것이다. 지금도 자신이 하는 일에 남의 조언이나 충고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하는 행위는 반짝하고 사라지는 하나의 짧은 빛 파장이다. 자신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자신의 묘비명 쓰기 작업을 한다고 자신의 삶을 너무 심각하고 무겁게 받아들이라는 건 아니다. 삶은 즐거워야 한다. 자신의 즐거운 삶이 주변 사람과 세상 사람들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더없이 감사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것이다. 자신의 묘비명 쓰기 작업은 계획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오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작업이다. 자신의 일과 역할, 그리고 성취와 실패도 내려놓는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 시기와 질투, 원망과 억울함, 두려움과 외로움도 내려놓는다. 인정 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욕구도 내려놓는다. 내려놓음은 매 순간 놓치지 않고 직면하여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수록 내 삶이 분명하게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을 이런저런 조건이 되면 하겠다고 다음으로 미루고는 후회한다. 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도 왜 그렇게 했는지 후회한다. 살아있을 때 하는 후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후회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후회를 했다면 다음에는 후회하지 않을 행동을 실천해야 후회가 완성된다. 후회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후회를 반복한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후회를 덜 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오늘 당장 지난 삶을 돌아보자. 이후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자기 자신과 약속해보자. 완벽한 약속은 없다. 약속은 조금씩 수정되고 보완해나갈 수 있다. 자신의 묘비명에 자신의 삶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새길 수 있을 때까지 매일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점검하자!
(Tip!) 자신의 묘비명 작성해 보기
혼자 조용한 곳에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바로 앉는다. 눈을 살짝 지그시 감는다. 심호흡을 세 번 한다. 심상으로 자신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장례식장에 상주는 누구인지?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 다른 가족과 친지들은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있는지?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러 오는 친구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관찰자가 되어 지켜본다. 이제 자신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볼 수는 있지만, 행동은 절대 하지 못한다. 자신이 모은 재산, 지위, 권력, 명성 등이 자신의 장례식에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가? 자신이 해보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이 있는지? 누군가와 직접 만나서 화해하고 용서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는지?
남아 있는 가족, 친지, 친구들,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 갈망과 충동, 욕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받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만약, 자신이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마음속으로 중계방송하듯이 또박또박 읊어본다. 이 문장을 자신의 묘비명에 쓰고 싶은지 다시 한번 읊어본다. 자신이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본다. 심호흡을 세 번 하고 조용히 눈을 뜬다. 이 세상에서 삶의 큰 파도를 만날 때 의연하게 당당하게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를 심사숙고해보는 연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