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그리고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아무 사심 없이, 아무 바라는 것 없이, 그저 객관적이고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H. Maslow)-
과하지욕(胯下之辱)! 남의 사타구니 아래로 기어가는 치욕을 말한다. 훗날을 내다보며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뎌내고 한나라 개국공신이 된 한신의 처세술이다. 한신은 자존감이 높아서 그런 치욕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 분노가 치밀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꾹 참고 있었던 것일까? 한신은 훗날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와 자기를 망신 주었던 사람의 능력을 인정한 후 자신의 신하로 삼았다. 한신은 ‘나는 그 X 때문에 망신당했다.’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다. 한신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잠재력을 믿었다. 남의 조롱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자존감이 엄청 높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사전적 의미가 다르다. 자존심(自尊心)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다. 자존감(自尊感)은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대하여 품위를 지키려는 감정’이다. 자존심은 남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마음이고, 자존감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마음이다. 심리학에서 자존감은 ‘자기 자신이 쓸모 있다(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자신의 주관적 평가’라고 한다. 무조건적인 자기 수용과 자기 존중의 느낌이다. 자존감은 자신의 객관적인 역량이나 성격 특성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자존감은 일, 학업, 관계, 정신적·신체적 건강 등 내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적응적 특성으로서 유익한 영향을 가져다 준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자존감의 속성 중에 나르시시즘적인 속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높게 유능하게 평가하는 ‘드러나지 않은(implicit) 자존감’은 나르시스적 자동반응이라고 본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는 자존감의 속성을 보이지만, 좀 더 극단적으로 드러나면 자기중심적, 오만, 자신감의 과다 등의 경향을 보인다. 또한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는 착취,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잘한다고 보는 우월성(superiority), 부러움과 시기심, 낮은 자존감, 수치심, 공감 능력 부족,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데 대해 도전받을 때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은 자존감, 즉 나르시스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나르시스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고해서 나르시스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인 나도 내가 가끔 약간의 나르시스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반응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 가슴을 토닥이며 ‘고맙고, 감사하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읊어준다. 내 안의 나르시스적 반응은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나서 조용히 내 의식 공간 밖으로 물러난다.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사람을 평가할 때 ‘자존심이 센 사람이다’라고 한다. ‘자존심 세다.’라는 표현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자존심이 너무 세다는 것은 외부 압력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태도다. 그럴 때 내 자존심은 남의 의도에 따라 상처를 받을 수 있다.
50이 되면 남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고 버티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자신의 자존심은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인 남의 의도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사람의 삶이 아무리 자신과 다른 사람과 관계로 이어진다고 해도,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지키는 전략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이 남의 의도에 따라 출렁거리지 않게 해야 한다. 자신이 자존심을 내려놓는 만큼 자신의 삶에 대한 남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 속박의 스트레스와 상처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의 그릇이 크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자신은 남의 쓸데없는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난다.
자신의 자존감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중하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이유다. 자신의 자존감은 남의 평가나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남이 뭐라고 하든 남의 기준과 잣대에 놀아나지 않는다. 내 삶을 사는 주인으로서 자신의 내면 경험을 알아차리며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세상 물정을 모르고 눈 감고 산다는 건 아니다. 현실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당당하게 직면하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자존감은 채우면 채울수록 은행의 예금처럼 통장에 쌓인다. 자신의 자존감은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서 쓸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좀 더 너그러워지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좀 무시당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아량과 배포를 가지고 싶다. 그런데 자신의 내면에 둥지를 틀고 있는 자존심은 조금만 건드려지면 바로 달려 나온다. 나이 50이 되면 자신의 자존심을 잘 다독거려줘야 한다.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내면에서 화의 감정이 올라온다. 앙갚음하고 싶다는 욕구도 올라온다. 상황에 맞지 않게 똥고집, 객기, 허세, 자만, 억지를 부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닌 척하지만, 자신의 얼굴에, 말투에 ‘내 자존심이 상했어’라는 티가 묻어난다. 관계가 점점 끊어진다. 50 이후의 삶을 더 팍팍하게 할 수 있다. 나이를 더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의 자존심 조절은 힘들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남에게 굽히기 싫다. 그래서 자존심은 더 세진다.
나이 50 이후에는 자존심만으로 살 수 없다. 자신을 내세우면 다른 사람들과 멀어진다. 자존심을 막대기처럼 꼿꼿하게 세우고 살면 삶의 넉넉함은 사라진다. 자신은 오히려 인정받지 못해서, 무시당해서, 비교당하고 지적받아서 자존심을 상한다. 남으로부터 항상 인정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남으로부터 늘 존경받으면서 살 수 없다. 눈을 밖으로 조금만 돌려도 잘난 사람이 너무 많이 보인다. 자신은 남의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 고로 자신은 남의 평가에 의존하는 자존심을 지키기는 불가능하다. 화투 놀이에서 ‘못 먹어도 고(go)!’라는 말이 있다. ‘위험한 줄 알지만 자신이 정한 대로 끝까지 간다.’라는 의도가 담긴 자존심의 표현이다. 자신이 이룬 성과를 자존심 때문에 한 방에 날릴 수 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다고 남에게 굽신거리며 비굴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마냥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자신의 내면에 자존감을 채울 수 있다. 남의 칭찬과 지적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자존감이 채워질수록 자신의 내면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안, 두려움, 분노, 열등감, 질투심, 수치심의 감정을 피하지 않고 보듬어줄 수 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는 것을 따뜻하게 다독거려 줄 수 있다. 자존감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다. 누구의 동의와 칭찬이 없어도 자기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믿어주기에 남의 평판에 맞서서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자신의 자존감을 채울 수 있다.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서 남의 도움과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자존감은 거창한 구호나 의지로 채워지지 않는다. 자존감을 채우는 심리학적 개입법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자기 수용’과 ‘자기 내면의 경험을 실시간으로 탐색’하는 방법이 있다. 사람은 매 순간 내외부 자극을 받고 있다. 이때 그 자극에 자동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경험(신체 감각, 생각, 감정, 욕구)을 판단하거나 검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자존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수용할 때 채워진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채워진다. 자존감은 자신의 체면도 내려놓고, 어두운 면조차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을 때 채워진다.
나이 50에는 이것저것 점검할 것이 많다. 학교에서 시험공부 하듯이 머리를 싸매고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도시에 살 수도 있고, 한적한 시골에서 살 수도 있다. 사람들을 덜 만나고 자연과 가까이 사는 조건이라면 자존심을 상할 일이 적을 것이다. 자존감은 점점 더 채워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소통하는 기회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조건에 산다면, 자존심 상할 일이 많을 것이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이 주눅 들게 만든다. 자신을 내세울 틈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는다. 50을 넘기면서까지 자존심을 붙잡고 있으면 상처를 받을 일만 더 생길 수 있다.
50 이후에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자존감까지 채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인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내가 없어지지 않나?’라는 불안한 생각이 올라올 수 있다.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은 남의 평판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의 삶의 만족과 행복에 남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반면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줄 때 올라오는 뿌듯함이다. 남의 시선을 분명하게 의식하지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믿는다. 자신이 가진 재능뿐만 아니라 열등감, 허점까지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존감이다. 남의 평판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자존감을 채워야 한다. 남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자신의 옷매무새나 태도, 언행은 조심할 일이다.
나이 50은 자존심의 줄다리기에서 이제 자신이 먼저 줄을 놓아야 시기다. 미리 준비하면 허둥대지 않는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다.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채운다는 것이다. 자존심도 지키고 자존감도 꽉 채우겠다는 것은 욕심이다. 자존심의 줄을 잡고 있으면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기 힘들다. 자신의 자존감은 마음속에서 ‘나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구나’라고 받아들여질 때마다 그만큼 채워진다. 지금까지 가족과 회사, 지역사회, 그리고 나라를 위해 애쓴 자기 자신을 위로하면 된다. 그런 자신을 수고했다고 안아주고 토닥여주면 된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받아주면 된다. 나이 50, 이제부터 자신의 마음속 자존감 통장을 채워나갈 시기다.
(Tip!) 자신의 마음속에 자존감 통장 채우기
하루에 5분 정도만 시간을 낸다. 조용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정면을 향해 눈을 살짝 감는다. 자신의 내면에 남아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을 찾아낸다. 열등한 자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우월감에 젖어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 이미지를 회피하지 않고 그냥 안아준다. ‘내 안에 내가 채우지 못한 수치심과 창피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 안에 내가 내세우고 싶은 욕구’를 알아차리고 따뜻하게 다독이면서 안아준다.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한다.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자존감 통장에 자존감이 쌓이고 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개설한 자존감 통장에는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곤경에 처할 때 꺼내 쓰는 비상금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