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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19. 2020

나에게, 라면 한 그릇

흡족함의 절정

실로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라면은 매우 귀한 음식입니다. 집에 라면이 있을 때가 잘 없어요. 라면을 잘 사지도 먹지도 않게 된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집에서 한국 마트가 좀 먼 편이라,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멀리까지 장 보러 다니게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요즘, 웬만한 기본 한식 재료 - 김치, 된장, 고추장, 간장, 쌀, 김,... -는 다 미국 마트에서 해결이 되는 덕분에, 한국 마트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합니다. 


얼마 전에 아이가 '짜장면'이 너무너무 생각난다고 노래를 불러서, 아이가 읽고 있던 책을 끝내면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어요. 그리고 약속을 지키러 '중화요릿집'으로 가야 했는데, 어차피 한국 식당들과 한국 마트는 가까이 몰려있는지라, 식당에 들렀다 집에 오는 길에 한국 마트에 들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 떡, 라면,... 이것저것 많이 사 왔었어요. 그날 저의 최애 라면 '5동통'도 잊지 않고 데려왔기에, 먹기 적당한 날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지요. 


오늘 유난히 춥고 싸늘한 날씨. 오늘이 딱 그 날이라는 감이 왔습니다. 그래서 만사, 만념을 제치고 물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5동통'에 대한 저의 애정을 최대한 표하는 차원에서 '5동통' 라면 개발자가 디자인한 순수 본연의 라면 국물 맛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평소 라면 끓이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파 송송 계란 탁'도 건너뛰었습니다. 라면 국물은 기분 좋게 얼큰하고, 면발 식감은 말 그대로 '5동통' 통통 튀며 술술 넘어가고, 마침, 깍두기가 잘 익어 함께 먹기 딱 좋았으므로, 모든 맛의 조화가 완벽했습니다. 면을 다 먹고는 밥까지 말아서,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깨끗이 비워냈어요.


이 '흡족함'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런 흡족함은 제 몸/입맛 컨디션과, 라면 컨디션과, 김치 컨디션, 그리고 기상 컨디션까지, 네 가지 조건의 합이 딱 맞아야만 강림할 수 있는 것이라, 정말 얻기 힘든 귀한 감정입니다. 만족감이 엄청났던 만큼 여운이 오래 남아, 브런치를 열고 글까지 올리는 것으로 이어져 버렸습니다.


언제 또 이 흡족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습니다. 오늘의 흡족함을 잘 기록해 두고 생각날 때 가끔 꺼내 보며 '눈으로 추억 라면' 하는 것이 최선이지 싶습니다.


만족감과 함께, 약간의 죄책감 -열심히 건강 관리 중인 자아에 대한 -이 밀려온 부분은, 40분 정도 운동을 하여 잠재웠어요. 이젠 죄책감이 만족감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감정 관리가 되었으므로, 아무도 뺏어가지 못한 꽉 찬 흡족함을 저녁 내내 누리다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라면이 항상 손 닿는 데 있는 분들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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