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트온 Dec 06. 2020

나에게, 인형 놀이

어른이 되어서 하는 인형놀이는 더 재미있다

나는 아직 인형 놀이를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형 놀이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유는, '우리들'은 숨어서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인형 놀이'가 취미입니다 

라고 말을 했다가, 혹시 뭔가 성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혹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슨 '증후군'같은 걸 가진 사람이 아닐까, 아니면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 시간이 어지간히 남아도나 보다 하는 떫떠름한 시선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척 귀찮은 일이므로, 정말 안전한 관계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좀처럼 말하지 않게 되거든요. 덕분에 '인형 놀이'는 오랫동안 틈틈이 혼자서 누려온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생활이었습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고, 부잣집 차압당하기 직전이라 소문나자 미친 듯이 좀도둑들이 득실거리고, 차압당하고, 이사 가고, 난리 통에 내 인형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청소년 시절 이후로 잠시 멈추었던 인형놀이를, 나는 첫애를 임신하고 다시 살려냈다. 극심한 입덧으로 꼼짝 못 하는 몸으로 침대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인스타에 가서 '#barbie'라고 한 번 검색어를 넣어보시라. 그러면 수천수만 명의 '우리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하트온의 인스타 페이지 1

어른이 되어서 하는 인형놀이는 더 재미있다. 


1. 내가 원하는 인형을 골라 살 수 있는 주권과 경제력이 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사 주시는 것을 그냥 받는 입장이었다면, 이젠 내가 인형을 고를 수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능력치가 증가했으니까요. 내가 받았던 최초의 바비 인형은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 주신 '원더우먼'이었어요. 사실 당시에는 '원더우먼' 티브이 프로를 본 적이 없어 잘 몰랐으므로, 그냥 예쁜 서양 여자 모습의 인형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빠는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비슷한 모습의 서양 여자 모습을 한 바비를 사주셨으므로, 저는 이 인형들을 여러 개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매우 낯설었던 그 인형들이, 오랜 시간 소유하다 보니 정이 깊이 들고 말았어요. 저는 이 인형들에게 숙모가 뜨개질 해 주신 스웨터도 입혀보고,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한복도 입혀보면서,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내가 입으로 인형들의 대사를 읊어가며 스토리를 만들어 노는 모습을 재밌어하며 바라보던 어른들의 웃는 얼굴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인형을 도둑맞는 것은 그 인형만 없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고 모은 인형들의 옷가지며 세간살이들, 그 소재들을 바탕으로 태어났던 스토리들이 하루아침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일입니다. 영영 다시 마주할 수 없게 되는 일이예요. 


나는 그때의 이야기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형을 하나 사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인형이 최대한 그때의 느낌을 갖고 있기를 바랬어요. 저는 그런 인형을 찾기 위해, 여러 가게를 돌며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사주신 인형들은 짙은 갈색 머리였어요. 얼굴은 서양인의 얼굴일망정, 머리카락은 최대한 한국인과 비슷한 색을 골라 사 오신 게 분명했어요. 딸이 금발머리를 동경하게 되는 일까지 미리 우려하셨던 걸까요? 금발머리가 판을 치는 바비 세계에서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인형과 가장 비슷한 느낌의 인형을 흑인 밀집 지역 '월마트'에서 겨우 찾아냈어요. 피부색은 이 인형이 훨씬 어둡지만, 비슷한 느낌이 살아있어 다행이었습니다. 



2. 아쉬운 기회, 못 가본 길, 이루지 못한 꿈들을 다독인다. 


저는 정말 해 보고 싶은 게 많았고 많습니다. 몸이 하나뿐이라서,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서,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자신감이 충분하지 않아서, 돌봐야 할 가족이 있어서, 지금은 해도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그때 태어나지 않아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가 보지 못한, 못가 본, 아쉬운 길이 정말 많아요. 패션 디자이너, 헤어 디자이너, 산업 디자이너, 산업 스파이, 해커, 드라마 제작자, 영화감독, 모델, 배우, 발레리나, 필라테스 강사, 테니스 선수, 리듬 체조 선수, 아나운서, 기자, 화가, 미술관 큐레이터, 호텔리어, 건축가, 연주자, 배낭여행족, 중세시대 귀부인, 경찰, 군인, 바리스타, 댄스 가수, 래퍼, 게이머, 의사, 수의사, 강연자, 데이터 분석가, 개발자,... 그 모든 가 보지 못한 길, 해 보지 못한 것들은 '인형놀이'의 소재가 됩니다. 자녀를 상대로 '인형 놀이'를 하는 것보다 진짜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은 훨씬 건강하고 건전한 '못다 이룬 내 꿈 해소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트온의 인스타 페이지 2


하트온의 인스타 페이지 3
하트온의 인스타 페이지 4
하트온의 인스타 페이지 5

3. '스토리'는 계속된다.


제가 요즘 가장 중요하게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글', '스토리'입니다. 브런치에 꾸준히 글 쓰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여기고 있는 요즘, 저의 다른 취미들에 손이 가지 않아요. 그게 좀 아쉬웠어요. 사실 저는 내 인형과, 전에 즐기던 다른 취미생활에도 역할을 주고 싶거든요. 그래서 '마음을 사로잡는 로맨틱 스토리'라는 매거진을 열었고, 이 매거진에 실리는 각 글의 대문사진은 스토리에 맞게 스타일링한 제 인형을 모델로 써서 직접 촬영할 계획입니다. 손이 부지런하게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마음은 벌써 신이 납니다. 어느 작가가 말했던 '개인적인 소확행'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이전 01화 나에게, 라면 한 그릇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