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지키는 특전사

'너를 사랑하는 훈련' 책을 쓴 이유

by 하트온

저는 자신을 특공대 전사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말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과 영혼을 공유하는 말일지도 몰라요. 저도 저 자신을 전사로 여기기 시작한 게 아들 둘을 낳은 이후부터였으니까요.


그전까지 저는 항상 누군가 나를 보호해 주고 돌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막연하게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결혼을 결심했던 20대 중후반의 저는, 겉으로는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였어요. 마음 깊이 내면 아이 상처를 가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결핍 투성이었어요.


더 자세히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의 인정과 관심에 심히 의존하며, 내 인생이 힘든 것에 대해 쉽게 타인을 원망하며, 결핍감과 낮은 자존감에 많이 시달리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누굴 사랑할 줄도, 돌볼 줄도 모르고, 그저 나를 충족시켜줄 무언가 - 안정감, 안전함, 소속감, 행복, 사랑,… - 를 목말라 갈구하는 그런 심리상태였던 것 같아요. 잠시 설렜다가 관계 갈등이 불러오는 정서적 고통에 짓눌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비슷한 패턴의 연애를 거듭하는 것도 지치고, 직장생활을 하며 점점 인생이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한 반복되는 일상에도 지쳐갈 즈음, 제가 변화를 갈구하며, 일생일대의 제일 판돈이 큰 도박을 저지른 게 ‘결혼’이었습니다.


'결혼 도박'을 저지를 바탕을 깔아주었던 건, 남편도 이 도박에 참여하기를 저보다 더 원했던 것과, 그때까지 연애 관계가 기분 좋게 유지되고 있던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분 좋은 관계가 오래 유지되었던 건, 저와 남편의 관계가 다른 연애보다 더 특별한 사랑이라서기보다, 긴 장거리 연애라는 상황도 한 몫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빨리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압도적으로 커서,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만한 아슬아슬한 요소들을 다 무시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마침내 결혼을 하고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저희는 결혼생활의 많은 부분이 기대하던 것과 심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둘 다 기대한 것과 다르다고 금방 포기하는 성격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다행히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라고 위안하며, 계속 함께 하는 삶을 이어나갔어요. 다른 건 다 엉망이라도, 둘의 관계만은 변함없이 이대로 유지되리라 믿었어요.


그 시절 제 삶의 가장 엉망이었던 부분은 제가 한국에서 누리고 가졌던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리고 - 그때는 그것들이 소중한 걸 몰라 함부로 버렸습니다- 만 키로가 넘는 멀고 낯선 곳으로 떠나가, 새로 정착해 살아가는 후유증, 고통이 너무 컸다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중공군처럼 밀고 들어오는 60년대 말에 미국에 이민 오신, 그 시절 사고에 갇힌 시부모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 내가 알지 못하는 며느리의 도리를 원하고 화내는 사람들. 그들의 닦달은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 사고가 폭력과 융합되어 생채기 낸 저의 내면 상처와 불안정한 성역할 정체성을 심하게 자극하며 다가왔습니다.


심신의 건강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저를 남편이 나서서 60년대 시월드에서 1.4 후퇴시키고, 제가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남편의 보살핌을 받고, 상담 선생님도 만나고, 도움이 될만한 모임에도 나가고 하면서 저는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오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도 가집니다.


2007년 첫 애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전체에 지금의 코로나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경제 위기 상황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새로 집을 막 사서 이사했고, 저는 임신과 육아, 커리어 체인지를 위해 연구원 일을 이미 그만둔 상태였는데, 남편이 구조 조정 정리 해고를 당해 버렸습니다. 남편은 돌파구를 찾아보려 했지만 도무지 재취업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그 사이에 또 둘째가 태어나고, 불안해하는 저까지 달래야 하는 현실이 앞이 캄캄해서 미칠 노릇이었던 것 같아요.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남편은 저보고 한국으로 떠나는 게 어떠냐고 했어요.


글을 쓰다가 그때의 암담했던 심정이 다시 그대로 되살아나, 손가락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바람에 잠시 멈추었다 다시 힘을 내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겨우 글을 이어갑니다.


이 적막한 한밤중에 과거 힘들었던 시절과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어쩌면 이 참담한 감정을 다시 마주하기 너무 힘들어서, 너희 부부 관계 회복 이야기를 글로 써 보라고 권유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둘째가 10살이 될 때까지 우리 이야기를 글로 그려낼 수가 없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지금 저는 10년 묵은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고 있는 거예요.


아이를 낳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산모, 산후 우울증까지 겹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던 저는 죽어버릴까 생각을 했을 정도로 앞이 캄캄해지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갓난아기와 천방지축 3살 아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선택, 어떤 길도 답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결핍 때문인 지는 몰라도, 저는 자식들에게만큼은 평화롭고 따뜻한 좋은 가정을 주고 싶은 바람을 강렬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엄마 아빠가 사이좋은 단란한 가정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줄 수 없게 된 상황 자체에 너무나 절망을 했어요. 나 자신은 부족하고 결핍 투성이라도, 책임감 강한 남편이 있는 것에, 아이들의 좋은 아빠가 되어줄 남편의 존재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지나치게 의지하고 의존하고 있었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내 마음이 남편을, 남편이 내 인생에 해줬으면 하는 역할을 깨끗이 포기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깊이 남편이 미워지거나 원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약 1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저는 남편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그때까지 제대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저를 남편은 소중하게 병아리를 키우듯 아끼고 사랑해 주었고, 미국에서 사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저를 측은히 여겼던 남편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과 지원을 다 했어요.


하지만 막상 남편 자신이 정리 해고를 당하고, 나라 경제는 어렵고, 회사들은 채용 동결 상태에 돌입한 상황에서, 남편은 더 이상은 저에게 줄 것이 없으니, 둘이 직장 생활하며 모은 은퇴 자금을 다 빼서 저를 한국으로 보내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었으니까요.


한국에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 취직 자리를 수소문한 결과, 내 연구 경력과 미국 회사/연구소 경험, 영어 실력에 관심을 보이는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그가 디렉터 자리를 맡고 있는 국제기구 안에 자리가 날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듣긴 했으나, 갓난아기 젖을 물리고 사는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가 않았습니다.


한국엔 저를 환영하며 받아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특히 아버지.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딸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성정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친정집의 도움은커녕, 아버지에게 이 일을 알린다는 건, 폭탄이 터지는 걸 감당하고 수습할 마음까지 먹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친정아버지 근처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나에게 평생 안전한 관계가 아니었던 아버지에 대해 내 아이들에게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란 신뢰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 종일 방방 뛰고 굴리는 3살짜리 아들과 갓난아기를 데려가서 방을 구하고 아기 봐줄 사람을 구하고, 10년의 갭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에서 잘 적응해서 직장생활을 원만하게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때까지도 저는 전사가 아니라, 보호자 구원자가 필요한 어린아이 상태의 마음이었으니까요.


다행히 그때 제 곁에는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오신 친정 엄마가 함께 계셨어요. 엄마는 저에게 일단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기를 잘 키우자고 옆에서 아기 키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계속 조언을 주셨어요. 엄마와 앞날에 대한 의논에 의논을 이어가다가, 저는 지난 10년 사이 그렇게 적응하기 어렵고 낯설던 미국이 가장 익숙한 내 집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시점에서 저에게 낯선 곳인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답이 아님을 확실히 인정하고 받아들였어요.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실수는 인생에 한 번이면 족했으니까요. 저는 이후로 더 이상은 미국살이에 대한 불평불만을 말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두 가지를 새롭게 마음먹었어요.


고아인 아이들도 있는데, 엄마라도 있는 게 어디냐. 내가 아이들에게 가정이 되어주면 되지 라고 생각했어요. 완벽한 가정을 만들어 주겠다는 미련을 접었습니다. 어떠한 가정이어도 어른 한 사람만이라도 바로 서 있으면 된다고 마음먹었고, 남편이 내가 기대하는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깨끗이 내려놓았습니다. 처음으로 줄곧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던 제가 어른으로 쑥 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남편에게 받은 사랑만큼은 노력해 보고 헤어지자 라고 생각했어요. 사랑할 줄 모르던 나에게 지극한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는 고마움이 있었으니까요. 남편과 대화는 없어지고 사이는 냉랭해졌지만, 제가 어느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저는 남편을 과묵하지만 책임감 강한 하숙생이라고 상상하며, 남편에 대한 호감, 긍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마음먹은 대로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 저는 강해져야 했어요.


덕분에 그전까지 남편에게 보호받고 남편이 다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던 어린아이 같았던 제가 점점 특전사가 되어갔어요. 그래야 나에게 중요한 존재들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아이들을 보호하고 키워야 한다는 현실이 저를 하루하루 강하게 성장시키고 있었어요. 저라는 사람 자신은 지혜가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매일 성경을 읽으며 지혜를 얻고, 전신갑주로 정신을 무장하고, 마음을 다지며 하루를 보냈어요.


아이들에게 매일매일 고마웠어요. 아이들만큼 용서를 잘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아이들은 어제의 못난 엄마를 싹 잊어주고, 오늘 또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입 맞춰주고 사랑해 줍니다. 부족하고 실수 많은 어른이었던 저는 아이들에게서 많은 사랑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가 하루하루 저를 치유하고 변화시키고 있었어요.


남편은 바닥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 같았어요. 연봉 2억을 받던 IT 프로젝트 매니저가 시간당 20불을 받으며 학생들 과외를 시작했어요. 나라 경제가 망해도 자녀 교육은 멈추지 않는 의지의 한국인들 덕분에 과외 선생 자리는 생각보다 수요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주말도 쉬지 않고 일을 하러 나갔기 때문에, 저는 마치 미혼모가 된 느낌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지냈어요. 강한 특전사가 된 저는 남편이 있건 없건 아랑곳없이,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으로 공원으로 수영장으로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찔한 사고 직전의 순간도 많았는데, 다행히 큰 사고 한 번 안 나고 이 거친 야생마 같은 남자아이들을 키워낸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감사


맞아요. 제 마음은 점점 더 감사해질 뿐이었어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태어나서 잘 자라 가고 있으니, 더는 바라는 게 없는 그런 ‘어미’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만 건강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아이들만 행복하면 다 괜찮았어요.


그렇다고 외롭고 힘든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누가 아침마다 와서 나를 안아주며 ‘넌 정말 소중한 존재다. 많이 사랑한다’ 이런 말을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그것에 대한 갈증이 심했는지, 사람을 고용해 볼까 생각도 했어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안아주는 남자’라는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낮에 아이들과 있을 때는 전사, 밤에 아이들 다 재워 놓고는 소설가가 되어, 상상의 나래 속에서 위로받고 버텼어요. 그리고 저는 언젠가는 남편과 이혼하고 독립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아이들과 스케줄을 맞추기 수월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 대학원에 진학해서 새로운 공부도 했어요.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니, '교육 심리'며, '독서 교육'이며, '이중 언어 교육'이며 모든 수업 주제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공부가 참 재미있었어요. 나중에 저는 대학원 과정 동안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글을 써서 교육 칼럼니스트로 활동도 합니다.


아이들 키우랴 공부하랴 잠잘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쁘게 살았지만, 제 마음은 끊임없이 저를, 제 과거의 삶을, 특히 저의 지난 결혼 생활을 돌아보았고, 저를 잠식하고 제 자아를 불안과 두려움 같은 각종 정서적 고통 속에 가두고 있던 거짓말들을 찾아내고 걷어내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어요.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자아를 다시 세우고 제대로 양육하는 대대적인 자아 정체성 건설의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감정 조절하며 상대를 배려하며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희생자 자리, 심판자 자리에 앉지 않고 겸허히 말하고 행동하며, 내 인생, 내 행복을 내가 책임지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상대의 경계를 존중하며, 동시에 나의 경계를 지키는 법도 배웠습니다.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 소신을 가지고 당당히 일어서서 살아가는 법을 깨우쳤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소중한 것을 돌보고 사랑하는 기술도 매일 훈련받았어요.


교생 실습을 끝내고, 석사학위를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따고 원하던 학교에 취직을 했어요. 이제 남편과 헤어져도 잘 살아갈 수 있다, 아직도 이혼을 원한다면 놓아줄 준비가 되었다, 이런 마음이 어느 순간 들었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제는 정말 떠나도 된다고.


그때, 남편은 오히려 다른 말을 했습니다. 이 가정에 희망을 다시 걸어 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동안 단순히 과외 교사로만 일한 게 아니라, 교육 사업을 열심히 일구었다며, 그 사업이 커졌으니 이제 함께 일구어 가자며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저를 자신의 세상 속으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남편이 그동안 맨땅에서 다시 시작해서 피땀으로 일군 재산과 사업을 다 공유해 주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변하는 것을 보며, 머리에 불이 떨어진 듯 뜨겁고 겁이 났다고 합니다. 자신도 변하고 달라지지 않으면,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해요.


부부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은 사실 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굉장히 천천히 조금씩 변화해간 것이었어요. 남편과 관계를 회복하고도, 예전처럼 편하게 웃고 떠들며 자연스러워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희는 지금 막 사랑을 시작한 40대 불륜 커플처럼, 손을 꼭 잡고 다닙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 몇 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홈스쿨을 하고 있어요.-카페와 공원을 전전하며 많이 대화하고 많이 사과하고 용서하며 함께 울며, 그동안 단절했던 소통을 다시 뚫어 내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남편도 저도 이젠 함부로 소중한 것을 놓아 버리지 않고, 함부로 불평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지킬 수 있는 '사랑의 특전사'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우리가 해낸 일은 당신도 분명히 해낼 수 있다고 믿어요. 당신도 특전사가 될 수 있어요. 어떤 어렵고 힘든 폭풍이 몰아쳐도 진정한 사랑을 이루고 지켜 가고 싶으신 '특전사 후보생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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