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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쟤쟤 May 02. 2023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산크리스토발(2) - 그저 앉아만 있어도 좋은, 매력적인 산크리




멕시코 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 나는 오랜만에 멕시코 여행을 다녀온 언니를 만나기 위해 반차를 쓰고 경기도로 향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으며 멕시코 여행 정보를 얻던 와중 언니는 정말 좋았던 곳으로 산크리스토발(이하 산크리)을 추천해줬고 나는 그 이름을 메모하며 산크리에서 할만한 게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산크리? 할 거 없는데?"

"거기는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어도 좋아."

"점심때 즈음 일어난 다음에 카페투어 다니고 밥 먹고 멍 때리면 시간 금방 가던데."


항상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했지만, 산크리에서만은 자의반 타의 반으로 쉬엄쉬엄 다니며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D+19


산크리스토발에서 지옥 같은 3일을 보낸 후, 산크리스토발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자 드디어 컨디션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세워놓았던 계획이 없어졌기에, 나는 마지막날에는 쉬엄쉬엄 시장과 동네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오전 11시에 달려간 곳은 초콜릿 전문점 Cacao Nativa. 너무 아팠던 나머지 음식을 먹을 엄두는 나지 않았으나 달달한 음료는 마시고 싶었고, 그래서 차선책으로 우유(con leche)가 아닌 물(con agua)을 베이스로 한 초콜라떼(chocolate)를 시켰다. 솔직히 물을 섞어서 맛은 그리 좋지 않았다(직원이 물 넣어달라고 했을 때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라). 그래도 당이 들어가니 약간 힘이 솟아났다.


cacao nativa에서 시킨 chocolate


이 날 딱히 정해진 일정이 없다고 위에서 밝혔으나, 사실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바로 한식당에 가는 것이었다. 3일 굶으니까 한식이 너무 당겼고, 마침 산크리에는 한식당이 5곳정도 있었다. 그중 나는 우리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안씨네(Casa de ahn)에 갔다. 가서 주문한 음식은 한국 직장인의 소울푸드인 제육덮밥.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도 될까란 의구심이 있었지만 메뉴판에서 제육덮밥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했고, 비록 반밖에 못 먹었지만 3일 굶고 먹는 한식은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식당에는 생각보다 외국인이 많았고, 사장님은 식당 내 유일한 한국인에게 캐모마일 차도 공짜로 주시는 등 이것저것 챙겨주셨다(산크리에는 서양 관광객이 많았고 동양인은 거의 없었다). 내가 3일 동안 죽다 살아난 얘기를 해드리니, 사장님도 처음 산크리에 오고 심하게 아팠다고 했다. 멕시코는 위생과 수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서 야채를 씻을 때도 그냥 물로만 씻으면 안 되고 약품으로 씻어야 한다고. 나만 아픈 게 아니었다는 동질감과 '이렇게 사람들이 아플 정도면 얼마나 수질이 안 좋은 걸까'란 생각을 하며 꿀맛 식사를 마쳤다. 


안씨네의 메뉴와 내가 시킨 제육덮밥. 산크리 물가치고는 약간 가격대가 있지만, 한식이니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광장으로 가니 먹거리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멕시코 특유의 원색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천막 안에는 츄로스, 빵, 음료, 술, 식사요리 등 다양한 음식을 팔고 있었다. 식사도 했고 아직 소화기관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눈물을 머금고 구경만 했다.


산크리에 머문 마지막날(금요일)에 열린 축제. 알고보니 정기적인 행사는 아니고 산크리스토발 495주년 행사였다.(어떤 사건의 495주년을 기념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선물 줄 기념품을 사기 위해 수공예 시장(Mercado de la Caridad)으로 향했다. 산크리스토발이 있는 치아파스(chiapas) 지역은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지만 그만큼 물가도 가장 저렴하다. 산크리스토발 이후에는 한국 물가급인 남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지금 기념품을 다 사야 했다. 


수공예 시장은 마치 미로처럼 노점상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금붙이, 팔찌, 옷 등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었다. 그중 나는 나처럼 걱정 많은 친구들을 위한 걱정인형, 마야족 특유의 문양이 들어간 머리띠와 머리끈, 걱정인형이 달려있는 지갑을 샀다. 총가격은 150페소 남짓으로 매우 저렴했고, 나는 흥정할 생각도 안 하고 단번에 구매했다.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수공예시장 골목(1)과 한 상점의 가판대(2). 내가 구매한 걱정인형(3)과 머리끈(4).


이렇게 시장구경을 하니 오후 2시였고, 딱히 할 게 없어 멕시코 경험자 언니들의 조언에 따라 카페에서 사람구경을 하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렇게 쉬엄쉬엄 책을 읽다가 전망대에 가고 싶어져 언덕 위의 성당인 Iglesia de San Cristobalito로 갔다. 


그렇게 초입에 도착하자 저 끝까지 늘어져 있는 계단을 마주했다. 원래 컨디션이었으면 10분이면 올라갔을 텐데, 지금 상태로는 계단 3개만 올라가도 몸이 안 좋아질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날이라 포기하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에 "그럼 천천히 구경하면서 올라가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당 초입의 계단들과, 계단 중턱에 앉아 찍은 산크리스토발의 평화로운 정경


그렇게 성당으로 올라가니 이미 하늘을 구경하기 위해 히피족과 배낭여행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1시간 정도 하늘 구경을 하다가, 문득 마지막으로 산크리의 노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이름은 Van Gogh Terraza로, 이름답게 음식보다는 전망대보다 이 카페에서 보는 산크리의 전망이 아름다웠을 정도로 전망이 아름다웠던 곳이다.


사실 과나후아토의 전망만큼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만, 카페에는 나밖에 없고 주변은 매우 조용했기에 관광객이 아니라 로컬과 같은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소설을 읽으며 차 한 잔을 하고, 지루할 때즈음 전망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려왔다.


카페에서 보이는 산크리스토발


내려오니 어연 저녁시간이 되었고, 센트로에는 마리아치가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광장 근처의 노을을 구경했고, 숙소로 가는 길에 히피족의 공연을 감상하며 저녁을 마무리했다. 산크리스토발은 '관광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나까지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산크리 마지막날의 노을과 과달루페 길거리에서 공연중인 히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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