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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Jul 07. 2022

#4. 미완.에 갇히지 않는 힘.

<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한동안 대학상담센터에서 대학생들을 집중적으로 만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각각 다른 어려움을 들고 상담실을 찾아오지만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얼굴들은, 모두, 무언가와 이별하지 못해 어딘가에 갇혀버린 얼굴들이죠. 그 얼굴들은 보통 어찌할 줄 몰라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떠밀려 온 지금의 자리에서 어쩐지 어색해하죠.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지만, 하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길을 잃은 얼굴은 각자의 기질과 상황에 따라 우울이 되고, 불안이 되고, 충동성이나 공격성이 되고, 때론 분열과 해리가 됩니다. 그러니 각자 어려움의 모습은 다르지만 대부분 뿌리는 '이전의 것에서 온전히 건너오지 못함'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생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그들의 몸은 현재에 있지만 어쩐지 마음은 10대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10대 때의 나는 어떠했는가를 이야기하느라 많은 시간을 쓰기도 하죠. 그때의 나는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와 강단도 있었고,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밤을 샐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이 있었다고. 그뿐일까요. 그들이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위험으로 보호해주는 층층의 보호체계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아직 배우지 못해 하는 실수들에 '미숙함'이라는 딱지를 붙여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의) 보호자들도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습득'이지 '생산'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시행착오를 거쳐 배우기만 하면, 그걸로 대부분은 그 존재 가치가 입증되곤 했습니다.


각자에게 10대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어쨌든 우리는 10대 때 많은 것을 배려받고 또 이해받으며 지나왔습니다.


하지만 20대 이후의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생산'에 가깝습니다. 대학 등을 다니며 아직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배움들 또한 '생산'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이미 '생산의 현장'에서 노동을 시작한 경우들도 있지요. 내가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데는 완성의 희열도 있지만 동시의 책임의 무거움도 있습니다. 내 결정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선택한 것들의 결과뿐만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인한 결과까지도 책임지는 마음. 나의 생산에 대한 모든 피드백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에 필요한 열린 자세. 내 마음과는 다른 생산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자기 사랑의 자세까지. 생산에는 이처럼 많은 것들이 따릅니다.


자, 여기까지만 읽으셨는데도 마음이 턱, 막혀오는 분들도 계실 테지요. 대체 누가 이렇게 거창한 마음으로 20대를 맞이하느냐, 제게 항의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을 의식하고 20대에 들어서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자고 또 일어나다 보면 20대에 도달해 있는 거죠. 마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나르는 에스컬레이터와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어도 에스컬레이터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다치지 않기 위해 나는 그 층에 일단 내려야 합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20대에 도달했다면 일단 이런 삶의 의미들이 내게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있으려 하다가 나는 다치기 쉽고 잘못하면 뒤에 오던 주변 사람들까지 다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꽤나 파장이 큰 일 같습니다.



이 답답함이 20대의 것이 아님을 압니다. 30대도, 40대도, 그 이후에도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우리에게 언제나 처음이니까요.


내가 도착한 시간에 산적한 많은 생산의 과제들이 무섭고 버겁고 답답할 때 우린 고개를 돌려 과거를 봅니다. 그때의 나는 더 반짝거리고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함께 같은 칸에 타있는, 그래서 별 말없이도 서로를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을 두세 칸씩도 뛰어오를 정도의 열정과 체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 무엇 하나 그때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나는 왜 여기 있어야 할까요. 다시 되돌려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밀려 올라오는 계단과 이미 도착해버린 층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그래서 곧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들에게 저는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당신의 과거에는 정말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거기에 무엇이 있기에 당신은 자꾸만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게 되나요.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의 모습대로 나이 들어갈 테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어느 누구도 완결된 상태로 내일을 맞이하지는 않는다는 점일 거예요. 아. 오늘의 나는, 한 달간의 나는, 지난 1년간의 나는 무엇하나 빠짐없이 완벽했어. 건강, 가족, 공부, 관계, 삶의 태도 그 무엇 하나 빠짐없이 다 마스터해냈어,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내 삶이 그래도 괜찮았어,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에 우선순위를 정해 그중 몇 개에 집중한 경우겠죠. 그러니 언제든 우리 인생은 돌이켜봤을 때 어딘가 '미완'된 상태로 내일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과거의 미완에 집착하게 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건 당연하지만 사실 세상은 더 이상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제껏 연습한 것을 바탕으로 네가 갈길을 직접 정해야 한다고, 그게 젊음이라고 말합니다. 자꾸 밀려오는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등 뒤로 느끼며 당신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해 우두커니, 혹은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미완의 시간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수능 공부할 때 기출이 중요하다며 기출문제를 몇 번씩 풀던 습관이 남아있는 거겠죠. 하지만 인생의 기출은 좋은 참고용일 뿐 정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나간 기출은 다시 출제되지 않기에 그때의 미완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상 별 효용이 없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미완에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미완은 미완으로 남은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미완을 참고하여 교훈을 얻으려는 태도는 좋지만, 과거의 미완에 집착하게 되면 현재를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미완에 집착할 때 그것은 나에 대한 분노가 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슬픔이 됩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우리는 '우울'을 만나게 됩니다.  우울은 무기력과 둔감을 선사하고, 나의 현재를 돌볼 힘을 앗아갑니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당신은 더더욱 과거의 미완에 집착하게 되겠죠. 우울의 고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미완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해보려고 애썼다는 증거입니다. 어딘가 완성된 부분이 있기에 미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거니까요. 당신의 미완에 집착하지 마세요. 당신이 할 일은 미완을 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현재를 사세요. 현재의 100%를 해내려 하지 말고 20% 정도는 미완으로 남겨두시고 내일로 가세요. 먼 훗날 뒤를 돌아봤을 때, 미완의 빈칸이 당신의 그림을 위해 필요했던 부분임을 알게 될 거예요. 미완에 갇히지 않는 힘을 우리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힘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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