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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Oct 22. 2023

#3. 분노. 나를 지키는 감정.

<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그게 벌써 코로나 전이니 3년 전쯤이네요. 2020년 1월 저는 제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방콕으로 혼자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걸 다 준비하고 TV를 보는데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중국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고, 혹시나 몰라 가져간 마스크로 여행지 내내 꽁꽁 싸매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비행기에서도 물도 안 마시고 초긴장상태로 귀국한 후, 며칠 안 돼 한국에서도 코로나 광풍이 불었죠.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방콕여행 사진을 지금도 가끔 찾아보곤 하는데요. 그때마다 제게 선명하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여행 일정 중 하루, 운 좋게 업그레이드된 호텔방에 하루종일 느긋하게 뒹굴거리다가 저녁 무렵 슬렁슬렁 밥을 먹으러 나왔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간식트럭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이름은 모지만 꼭 크레페처럼 생긴 얇은 전병에 각종 맛이 나는 크림을 넣어 둘둘 말아주시는 한입거리 간식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맛없을 수 없는 필승조합이었죠.


세 가지 맛이 다 먹어보고 싶어 얼마냐고 물어보니 영어를 못하는 그분께선 싱글싱글 웃으며 계산기에 숫자를 치셨습니다. 1개에 4밧. 오케이, 를 외치며 3개를 달라고 했습니다. 간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설레던지요. 소중한 내 간식...


3개의 크레페가 완성되고 저는 50밧을 냈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다시 싱글싱글 웃으며 간식과 함께 거스름돈 20밧을 주셨습니다.


아.. 음... 50-12=38. 거스름돈은 38밧이어야 하는데, 저의 18밧은 어디로 갔나요?


거스름돈이 모자라니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계속 싱글싱글 웃으며 태국어로 말씀하십니다. 저는 저대로 (영어로) 거스름돈이 모자라다, 18밧 더 달라고 얘기하지만 그분은 또 그냥 웃으며 태국어와 함께 가라는 손짓을 합니다.


아니, 제가 태국어를 못하지 산수를 못하진 않는데요... 거기서 2-3분가량 실랑이를 하고 있으니 지나가던 젊은 태국 여성분이 영어로 무슨 일이냐며, 도와줄까요? 물으십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분이 단호한 어투로 태국어로 아주머니에게 무언가 말씀하셨고, 아주머니는 그제야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10밧을 주십니다. 그 여성분이 다 된 거냐고 물었지만 아니다, 나는 18밧을 받아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다시 여성분이 태국어로 아주머니와 실랑이. 아주머니 얼굴에서 드디어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여성분 또한 중간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상황. 이때부터 엄청난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냥 이 정도, 여행지의 바가지 에피소드라고 넘길 수도 있겠죠. 8밧 덜 받은 거니, 우리 돈으로 당시 300원 정도. 정말 그냥 넘길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게다가 날 도와주려는 이 여자분까지 껴서 더 민망하고 시끄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쳐다보고 옆 트럭 음료수 아저씨도 험상궂게 절 바라봅니다.


그냥 됐다고 하고 어서 호텔로 갈까. 제 손에 들은 봉지 속 전병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발길을 돌려 호텔로 가려던 그때, 그런데, 제 안에선 그렇게 하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웃으며 관광객 바가지 씌우는 아주머니를 응징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위해 발 벗고 나서준 친절한 현지인이 고마워서만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가 나를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이 여행이 어떤 의미이고 내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기에 그렇게 번 나의 돈을 이렇게 날리긴 싫었습니다.


다신 안 볼 사이니 내게 뭐라든 상관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중에 두고두고 이 장면을 떠올릴 때 민망함에 밀려, 혹은 되지도 않는 관광객 놀이에 밀려 나 자신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까 봐 그게 참 싫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정당하게 나의 것을 보호하는 것이 진상도 아니고, 인간미 없는 것도 아니고,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이 마음이 들자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필요 이상의 화나 분노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 목적은 딱 하나, 나의 정당한 8밧을 돌려받는 것. 그거면 된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그 이상의 감정이 없이 딱 그만큼의 감정만 경험하는, 제 인생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상담실에는 다양한 분노가 옵니다. 평생 다른 사람의 분노에 노출되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볼 여력도 없이 분노에 잠식당한 분들.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넘쳐나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신체의 아픔으로 나타나거나 깊은 슬픔이 된 분들. 그래서 상담실의 누군가에게는 '분노'라는 단어가 가장 어려운 감정이기도 합니다.


모든 감정이 그렇듯이 분노는 자신의 고유한 기능이 있습니다. 분노는 정당한 것을 정당하게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나의 경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허락 없이 그 선을 넘음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지키려는 그 마음을 우리는 분노라고 부릅니다. 전쟁에서 내 영토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모르면 나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처럼 내가 내 경계를 잘 알지 못해 넘어오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 보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분노로 나를 지킬 수 없어집니다.


또 어떤 경계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무엇은 허용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을 허용할 수 없을지 구분해야 하는 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그 무수한 선택의 순간에 내가 나를 어설프게 포기하면, 결국 내 안에는 어설픈 분노가 쌓이게 됩니다. 그 어떤 분노보다 강력한 나에 대한 분노가 말이죠.


무엇을 열든, 닫든. 허물든, 쌓든. 그 모든 것의 주체는 나, 입니다. 누가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한들, 혹은 무엇을 뺏겠다고 협박한들 내 경계의 주인은 나입니다. 정당한 순간에 분노를 꺼내어 나를 지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넘어오려는 그 사람이 모르고 그랬다면 앗, 멋쩍은 표정과 함께 당신과의 거리를 조절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당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그랬다면 그건 더더욱 막아야 할 일인 거죠. 조금만 그렇게 여유가 있게 되면 분노의 수위와 표현 방법은 점차 노련해집니다. 그건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니, 겁내지 마세요.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올바른 거스름돈을 받아 호텔로 돌아오던 그 길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뉘엿뉘엿 지는 해와 덩달아 꽤 선선해진 바람, 그 사이를 걸어오는 제 발걸음은 가벼웠고 뿌듯했고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딱 그만큼의 화를 낸다는 것은 이리도 가볍고 기분 좋은 일이구나. 전에 없는 경험이고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서 내가 나를 지켜주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상담교과서에서 숱하게 배웠지만 한 번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분노의 정의가 떠올랐습니다. 어설픈 분노가 만들어냈던 수많은 자책의 시간과 망쳐진 관계를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지키지 못한 수많은 과거의 나에게 그 8밧이, 조금이나마 사과가 되었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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