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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Sep 27. 2023

#1. 상처.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방식.

<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상담자 윤리에서는 상담자는 정해진 상담료 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합니다. 아무리 상담자가 섬세하게 배려해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담자-내담자 간의 심리적 힘의 불균형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러기에 상담자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착취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상담 중간에 내담자가 사 오는 커피 한 잔도  상황에 따라서는 거절해야 하는 상담자의 남모를 속앓이가 있죠.


하지만 이런 상담자가 매 번의 상담마다 내담자에게 합법적으로(!) 받는 것들이 있기도 합니다. 바로 내담자들이 남기고 가는 말 또는 노래들이죠. 그중 어떤 것들은 아주 오래 상담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남은 마음들이 다른 내담자에게 전달되기도 합니다.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살아남아 제 마음의 보석함에 있는 것 중에 하나는, 한 내담자가 남겨놓고 간 노래입니다.




한 대학에서 만났던 내담자의 첫 만남은 희미하지만 강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한결같은 무채색 의상에 푹 눌러쓴 모자, 그리고 거의 되지 않는 눈 맞춤이 그 내담자의 인상이었거든요. 자신의 이야기를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소리도 정말 작고 표정도 보기 어려워서 항상 허리를 곧추세우고 몸을 숙여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갈등이 극에 치달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수치심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 말고는 견뎌내지 못하던 내담자를 기억합니다.


네가 너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아픈 것도, 다치는 것도, 상처를 보며 다시 깊은 좌절감에 빠지는 것도 싫으니 우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 순간은 강렬한 파도 같아서, 질식할 것 같이 컴컴한 절망도 결국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짐을 알지 않느냐고. 우리 그 파도에 버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렇게 간절하게 내담자를 설득하던 기억이 납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자신이 쓴 글을 가사로 붙이고 싶어 하던 내담자는 그날 이후, 다시 한번 깊은 절망이 자신을 잠식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사를 필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울며, 때로는 화내며 써 내려간 그 필사노트를 상담실에 와서 보여주면 저도 함께 울음을 삼켜야 했습니다.


대학상담센터였기에 주어진 회기가 그리 길진 못했고 정해진 종결회기를 마치고 마음을 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상담실을 나갔던 내담자는, 그리고 일주일 후에 상담센터에 간식과 편지를 두고 갔습니다.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상담실을 나와야 했다며 내담자가 남긴 편지는 지금도 제가 가끔 열어보는 편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는 제가 상담의 모토처럼 삼고 있는 노래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Leonard Cohen이 부른 <Anthem>의 한 구절인데요.


Ring the bells that still can ring

Forget your perfect offering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고, 그것이 빛이 들어오는 방식’이라는 이 노래의 한 구절 가사를 편지에 적어 준 내담자는 이젠 자신의 상처가 그저 상처가 아닌 조금씩 희망이 들어오는 통로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상담이 그렇게 도와주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꽁꽁 싸매느라 정신없던 자신의 상처를 이제는 조금씩 바라볼 수 있게 된 내담자의 눈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발견했던 것은, 상담자로 일하는 시간 동안 받았던 잊지 못할 선물 중 하나입니다.



상처가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요. 생명이 없는 물건들도 쓰다 보면 잔기스와 상처가 나는 게 당연한 것인데, 하물며 살아있는 우리라고 피할 수 있을까요. 상처는 당연한 것이기에, 그래서 내담자들은 가끔 자신의 상처에 더욱 의심을 갖곤 합니다. 모두가 이 정도쯤은 힘든 것 아닌가요, 제게 대한민국 평균 상처(!)를 물으시기도 하구요. 다들 이 정도 상처쯤은 있는 건데 내가 너무 나약한 건 아닌지 자신의 마음의 내구성을 의심하기도 하십니다. 공감이 가는 이 모든 이야기들 뒤에는 상처는 숨기고 싶은 것, 언제나 나쁜 것, 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 상처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있습니다. 살이 솔솔 마데카솔처럼 상담이 상처를 감쪽같이 없애는 연고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참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상처는 우리가 살아 움직였다는 증거입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 달팽이처럼 안으로 꽁꽁 숨어버린다면 생기지 않을 외부로부터의 상처를 무릅쓰고, 그래도 세상 밖으로 자신의 외현을 넓혀가겠다는 용기의 증거이지요. 사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성장하든 말든 그저 아무것에도 접촉하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너무 지쳐 선택한 잠시의 휴퇴는 현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식물이 자라는데도 물뿐만 아니라 바람과 햇빛, 때로는 적당한 해충의 침입이 필요한데 그보다 더 복잡한 사람에게 더 많은 종류의 적절한 외부자극-때로는 좌절이 될 수도 있는-이 필요한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니 상처는 우리가 용기를 내어 우리를 돌보았다는 역설적인 증거입니다.


또 상처는 우리에게 나의 어디가 약한지 알려줍니다. 한창 코로나가 창궐할 때,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 사람의 가장 약한 곳에 침투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픈 곳이 그 사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이진 모르겠지만 꽤나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딱 그렇게 작동하거든요. 똑같은 종류의 스트레스를 동시에 겪은 사람이 있어도 사람들마다 마음에 나는 상처의 양상은 다릅니다. 평소 그 사람에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인 거죠.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잡는 것이 늘 어려웠던 이는 바로 공상의 세계에 나만의 집을 짓게 되구요. 유연성과 규칙 사이를 걷기 위해 노력하던 이는 바로 경직된 군인모드가 됩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나의 상처를 통해 나의 성장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성장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는, 바로 우리의 균열된 상처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확인하는 것임을 그때 그 내담자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상처는 늘 어둡고 캄캄한 구덩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그곳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지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균열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 빛을 외면하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죠. 각자가 가진 균열은 다 다른 모습일 테니 그것을 통해 들어오는 빛도 각양각색일테이죠. 엉뚱한 상상이지만, 내 고유의 균열과 그 사이로 들어온 빛을 서로 자랑하는 ‘상처 자랑대회’가 열린다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저의 균열은 그 사이로 들어온 빛은 어떤 모습일까요. 상상력이 부족한 저는 사실 잘 떠오르지 않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것이 가장 저 다운 모습과 닮아있으리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여러분의 균열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 사이로 어떤 빛이 들어오고 있나요.

당신의 균열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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