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의 방 Oct 22. 2023

#6. 감정적 현실. 마음의 이석증.

<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의 일원으로, 여러 역할들을 꼼꼼히 해내려 애쓰는 사람에게 만성적인 질병들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잦은 위장장애나 허리통증쯤은 이제 친구처럼 여기는 저이지만, 조금 과로하고 스트레스가 심하다 싶으면 덜컥 겁나게 하는 병이 있습니다. 바로 이석증입니다. 


걸려본 사람은 알 그 이석증은 몇 해전, 제가 대학원 입시와 이사를 동시에 처리하느라 인생 최대 빡셈을 보내고 있던 겨울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세상이 흔들린 거죠. 잠시 어려움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라, 이게 웬걸. 저의 어, 소리는 곧 으러러러어ㅓ어어어! 로 변했습니다. 찰나였지만 지축이 360도 돈다는 게 이런 거구나,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고 곧 세상은 원상복구 되었습니다. 다시 조심스레 누웠는데 세상이 여지없이 돌았습니다. 고상하게 아... 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통증이 없으니 아픈 건 아닌데 너무 무서워 간만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옆에 있던 남편을 붙잡아도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저 남편과 함께 돌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이비인후과로 갔고 몇 가지 검사를 거쳐 예상대로 이석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석증 치료라는 것이, 예상보다 굉장했습니다. 로봇으로 혈관수술도 하는 이 21세기에 이석증은 그냥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휙휙, 돌려 돌을 제자리에 넣는 것이 이석증의 치료였습니다. 치료를 위해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두 분이 오시고 저는 VR 고글처럼 생긴 걸 끼고 베드에 앉았습니다. 의사 쌤이 제 얼굴을 왼쪽 방향으로 돌아가게 잡은 뒤 하나 둘 셋, 하시더니 저를 베드에 휙 눕히시더군요. 어느 쪽 돌이 어느 방향으로 빠진 지를 찾으시는 건데, 정말 눕혀지는 순간 저는 으아아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간호사 쌤 두 분의 역할은 그거였습니다. 환자의 탈주를 막는...) 여지없이 도는 세상에 놀라 당장 벌떡 일어나려 침대 옆을 힘껏 움켜쥐는데 의사 선생님이 다급히 외치셨습니다. 


"괜찮아요! 저 여기 있어요! 침대 안 돌아가요!"


단골 이비인후과에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하긴 치료 때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선생님 말만 믿고 몇 번을 그렇게 고개를 휙 돌리며 치료를 마쳤습니다. 


저렇게 치료를 하고 와도 며칠을 세상이 돌았습니다. 저의 취미는 누워있기인데 며칠을 쇼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자야 했고 고개를 휙휙 돌리지도 못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잘 수는 없어 침대에 누우려고 하면, 눕기 전 심호흡을 크게 하고, 침대 옆을 꼭 부여잡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몇 번을 되뇌었습니다.


눕고 나서 세상이 돌아도,

실제로 도는 게 아니야.

그러니 난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건 곧 끝나. 난 안전해.




상담 용어 중 '감정적 현실(emotional reality)'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똑바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에 맞추어 세상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자신의 맥락에 맞추어 해석합니다. 그중 유독 현실을 자신의 감정에 맞추어 해석하는 경우, 그분은 '감정적 현실'을 자신의 세상으로 주로 채택한다고 말합니다. 


종종 느낌과 감정이 나를 압도합니다. 그래서 그냥 이게 내 세상의 전부라고 느껴질 때가 있죠. 옆에서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이땐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여기에 없잖아. 내가 보는 대로 보지 않잖아. 이 답답함과 억울함이 쌓이면 소리치고 싶어 집니다. 니들이 뭘 안다고! 곧 나를 모르는 너희들과 나를 차단하게 됩니다. 개개인에게 있는 '주관적 세계'는 나의 밖에 있는 '객관적 세계'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끔 이 주관적 세계가 나를 압도하면 우리는 '감정적 현실'에만 살게 되는 거죠. 사실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는 모두 중요합니다. 주관적 세계가 객관적 세계를 압도하면 우리는 내적으로 고립됩니다. 심한 경우 망상과 환상에 빠져 살게 되지요. 반대로 객관적 세계만을 믿고 살면 우리는 우리 고유의 내적 나침반을 잃게 됩니다. 살아있지만 버석한, 사막 같은 삶이 되겠지요.


어떤 사람과의 일로 기분이 영 나빠졌다고 가정해 보죠.

"걘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어!"

"걔가 그렇게 말할 때 정말 말라죽는 것 같았어!" 그리고

"걔가 그렇게 말할 때 정말 말라주는 것 같아. 난 그렇게 느껴져"는 완전히 다른 인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걔가 말할 때 꼭 말려 죽이려는 같아 두렵고, 무섭고, 무기력해지는 내 내적세계는 소중합니다. 이 감각이 없다면 나는 나를 지킬 방도도, 위험을 감지해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질 방도도 찾을 수 없으니까요. 내 감정은 내 거야, 상대가 만든 게 아니야. 내가 만든 내 감정이니 내가 잘 들여다보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갈무리해 도닥여주고 여며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감정이 조절도 표현도 가능해집니다. 감정의 기본 속성을 물 같아서 우리가 억지로 수로를 바꾸거나 막지만 않는다면 순리대로 흘러가 사라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나의 '현실'을 네가 만들었다고 상정하는 순간 내 내적세계가 가진 순기능은 모두 무시당하고 내 감정적 현실의 화살은 모두 너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거지 같은 현실의 책임이 나한테 없다고 여기면 당장 내 마음을 편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대부분은 더 상황이 나빠집니다. 무엇보다 네가 만든 그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네가 나를 꺼내주지 않으면 나는 계속 이 지옥에 머물러야 하지요. 어떤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을까요.




가끔은 나 자신이 아주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이 거지 같은 환경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늪처럼 느껴지구요. 물론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그렇게 느낀다고 내가 진짜 형편없는 사람인 건 아닙니다. 내가 느끼는 나와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타고난 능력도 아니고 그저 꾸준한 훈련과 연습만이 정답입니다.


제게도 이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럴 때 제가 쓰는 방법이 있는데요. 제 머릿속을 괴롭히는 생각들을 제가 메일로 받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가끔 정말 메일로 써보기도 하죠. 그리고 텍스트 그 자체에 집중해서 한 자 한 자 읽어봅니다. 내용을, 글자를 (심지어 처음 보는 언어의 알파벳을 읽는 것처럼!) 하나하나 읽다 보면 어느덧 감정이나 기분은 휘발되고 건조한 팩트와 문자들만 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죠. 자, 이게 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면 몇 정 정도짜리 엉망인 것 같니? 그러면 대부분 고득점을 하긴 어렵습니다. 진짜 엉망인 사람이 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오래, 지속적으로  필요하거든요.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저는 이 일을 '강 건너 불구경 전법'이라고 부릅니다. 가끔은 제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는 건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의 오랜 필살 전법이니 한 번 믿어보셔도 좋을 거예요.




이전 06화 #5. 강박. 나를 파괴하러 온 그럴싸한 건강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