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얼마 전 지독한 감기 몸살을 앓았습니다. 사실 감기는 어릴 때부터 철철마저 달고 살아온 친구 같은 존재인데 문제는 몸살이었습니다. 감기에 걸려 좀 컨디션이 떨어지는구나,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자다가 깨서 곡소리를 내며 무릎 꿇고 앉게 되는 그런 몸살이었죠. 코로나와 A형 독감에 걸렸을 때 이 정도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또 코로나인가 싶어 집에 있던 자가키트를 주섬주섬 꺼내게 하는 그런 몸살이었습니다.
그렇게 앓던 어느 날 새벽, 또 몸이 아파 잠에서 깼습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정말 심상치 않다 싶었죠. 게다가 온몸이 뜨끈한 것이 정말 이상하다 싶어 집에 있던 체온계로 체온을 쟀습니다. 어, 근데 이상하게도 체온은 높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평소 체온보다 낮았죠. 이번엔 왼쪽 귀에 갖다 댔는데 여전히 낮습니다. 이 쯤되면 아, 열이 나는 건 아닌가 보다, 하면서 그만할 법도 한데요. 그날은 어쩐 일인지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안 하던 행동들, 그러니까 옆구리에 껴본다든가, 입을 벌려 안 쪽에 넣어보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지금 쓰고 보니 더욱 창피해 지네요...) 그렇게 체온계를 가지고 씨름을 하던 저의 부산스러움에 잠을 깬 남편이 체온계가 이상하냐며 제 머리에 손을 대보았지만, 열이 나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굴하지 않고 또 체온을 재는 제게서 체온계를 가져간 남편이 자신의 체온을 재지만 정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체온계 고장 안 난 것 같은데...'라는 말 한마디에, 저는 눈물이 와락 났습니다. 그러면서 제 입에서 나온 외마디 말은 이거였습니다.
"나 열난다고!"
(아마도 미열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열도 가라앉고 컨디션도 비교적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지금 그 새벽의 체온계 사건이 왜 떠올랐을까요. 체온계는 역시 비싼 걸로 사야 돼,라는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이 떠오른 걸 아닐 겁니다. 저는 그때 뜬금없이 터졌던 저의 눈물과 외마디 말이 자꾸 마음에 맴돕니다.
체온계가 제 고온을 증명하지 않더라도 사실 저는 아팠습니다. 제가 아프다는 것은 다름 아닌 제 온몸과 신경이 증명하고 있죠. 평소에는 한 시간이면 마무리할 일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해내지 못하는 저의 말도 안 되는 생산성도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고작 (고장 났을지도 모를) 체온계가 저의 아픔을 증명해 주기를 그토록 애타게 바랐을까요.
사실 제가 아파서 예전만큼 저의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선 좀 더 쉬라고 성화죠. 하지만 어쩐지 제 마음속엔 '체온계가 증명할 만큼' 고온이어야 내가 비로소 마음 편히 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여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달리는 것을 멈추기 위해 외부의 승인이 필요한, 아직은 어린 저의 마음을 봅니다.
예전의 저는 확실히 더 승인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내가 내 고통을 스스로 인정하는데 훨씬 더 박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청춘과 젊음은 '지치지 않는'으로 상징되기에, 힘들다고 말하면 '뭘 했다고 지치냐며' 내 힘듦을 인정받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돌도 씹어먹는' 청춘의 나약한 투정으로 보인다면 그건 배로 서러운 일일 것 같았던 거겠죠.
몸이든 마음이든 아파지고 약해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지탱해 줄 대상을 찾게 됩니다. 평소에 내가 나랑 잘 지내면서 든든한 내적 지지대를 쌓아두었다면 그것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혹은 그걸로는 부족하다면 외부에서 나를 승인해 줄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넌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충분히 열심히 했기에 이렇게 아파도 되는 거라고.
이만큼 아프다면 누구든지 더 할 순 없을 거라고. 잠시 쉬어도 된다고.
나에게 그렇게 말해 줄, 나의 잠시 멈춤을 승인해 줄 대상을 찾게 됩니다.
어쩌다 운이 좋게 그런 목소리를 듣게 되기도 하지만, 많은 순간 우리는 적절한 때 괜찮다는 목소리를 찾지 못합니다. 그건 세상이 차갑거나 혹은 내가 충분치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진짜 필요한 그때, 진짜 필요한 그 승인의 말을 해주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에 걸친 관찰이 필요한데요. 우리가 그렇게 긴 호흡으로 서로를 바라봐주는 일은, 성인의 세계에선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끈질기게 관찰해야 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씨앗이 심긴 땅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말이죠.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무엇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압니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과 소진 또한 결국 나만이 알 수 있습니다. 가끔은 그런 내게 자신이 없어 승인받고 싶은 그 당연한 마음조차도 가만히 관찰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그만큼 많이 힘들고 지쳐있구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내가 안아주는 나, 이구나. 스스로가 스스로의 체온계가 되어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말해주고 때로는 경고해 주며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쯤에선 쉬어야 한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외부의 체온계는 대부분, 내게는 정확하지 않은 고장 난 체온계일 때가 많거든요.
잘하고 싶은 마음도, 하지만 지친 마음도 모두 나로 기꺼이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우리의 할 일이란 무엇보다 나를 기꺼이 인정해 주는 용기라는 내공을 단단히 키우는 것, 그것 외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