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재미. 꼭 있어야 하나요?

<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by 마음의 방

언젠가부터인지 우리는 재미를 찾는 것이 삶의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 것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요 몇 년간의 심리학 관련 베스트셀러나 조회수가 높은 유튜브의 섬네일을 봐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다' 류의 글귀들을 쉽게 찾을 수 있지요. 마치 재미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가짜 삶인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본격 '재미 권하는 사회'인 셈이죠.


상담실에 무기력과 우울로 어려움을 겪으시는 내담자들을 많이 만납니다. 인생의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사고처럼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버린 분들도 계시지만, 어떤 분들은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를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대학에 오고 나서 혹은 취직을 하고 나서 오히려 목표가 없어졌다는 허탈감에 깊은 우울에 사로잡히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런 분들은 이유도 그 시작도 가늠하기 어려운, 마치 늪과 같은 우울감에 깊이, 깊이 잠식된 것 같은 일상을 겪어 내고 계십니다. 이런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우울감에서 서서히 나올 수 있을지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이유 없는 우울의 이유로 지목하시는 것이 바로 '재미있는 일을 찾지 못해서'입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인생의 획기적인 재미가 어느 날 자신을 이 우울감의 늪에서 구해줄 거라 믿고 계시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은 우리 가슴을 뛰게 하고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없죠. 우울로 가득 찬 세상이 희뿌연 모노톤이라면 재미는 그 모노톤에 하나씩 색깔을 입히는 선명한 물감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선명한 물감이 의미 있는 요인이 되어 우리에게 메시지로 전달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밑그림입니다. 연필로 수없이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그려낸 밑그림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물감을 입힐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연필로 그린 밑그림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일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영어로 우울증을 의미하는 Depress은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 De와 밀다를 의미하는 Press의 합성어입니다. 우울은 우리가 삶을 계속 밀고 나갈 원동력을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는 거죠. 우울의 늪에 빠진 우리는 '나를 사로잡을 재미있는 일'만 찾게 된다면 지치지 않는 동력을 얻은 기차처럼 달려 나갈 수 있을 거라 꿈꿉니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튼튼한 기차도 무한한 연료를 가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성비 좋은 연료가 나온다 한들 결국 우리는 정기적으로 연료를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기차를 점검하고 수리하며 과열된 기차를 잠시 쉬게 하거나 속도를 조금 줄여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어떤 기차가 자신의 몫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다면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 연료 때문이 아니라 수리하고, 연료를 넣고, 정비하는 일련의 일상적인 행위들 때문일 것입니다.


일상은 지루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할 것이 없죠. 매일 같은 것을 점검하고 돌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지켜봐야 합니다. 나하나쯤 돌보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곳을 정기적으로 관찰하며 돌보아야 합니다. 일상은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는 시간'이라기 보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시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일상을 달리는 나라는 기차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는 그 일상의 시간은 우리를 내 할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을 맛보게 돕고, 수없이 오고 가는 손님들과 뜻밖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합니다. 만약 기차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운행하기를 거부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차는 영원히 특별한 일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달리지 않는 열차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깃들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우울로 어려움을 겪으시는 내담자들께 꼭 일상의 회복을 권유합니다. 숙제로 내드리기도 하죠. 일상의 회복은 쉬운 것부터 시작됩니다. 식사를 꼭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 약을 드시고 계시다면 빠트리지 않고 복용하시는 것.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정돈하는 것. 환기를 시키는 것. 강아지 사료와 물그릇을 꼭 닦고 다시 밥을 주는 것. 자신을 돌보는 것을 연습하며 습관처럼 만듭니다. 너무 깊은 우울로 경제활동을 멈춰 계신 분들께도 간단한 아르바이트라도 꼭 경제활동을 하시기를 권장합니다. 내가 받는 상담료만 번다, 정신과 진료비만 번다, 핸드폰 요금만 번다와 같이 아주 작고 현실적인 하지만 나를 직접적으로 돌보고 거두는 행위에 내가 직접 기여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무너진 자존감의 기초를 쌓아 올리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자신을 돌보는 것이 충분히 연습된 분들께 드리는 미션이 되겠지요.


다행히도 우리 인생은, 꼭 재미라는 연료가 없이도 시동이 걸립니다. 아무런 의미도 재미도 찾을 수 없지만 일단 한 발을 떼고, 그다음 발을 떼고, 그래서 걸음이 이어지면 그렇게 우리 인생은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온통 모노톤인 것 같아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는 다음번엔 좀 더 편하게 시동을 걸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인생에 조금씩 깃들기 시작한 여러 가지 색깔들을 만날 수 있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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