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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Aug 11. 2023

#10. 관계. 우리 사이에 선선한 미움이 드나들도록.

<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이제는 선선한 마음으로 꺼낼 수 있는 시절이지만, 저의 고등학교 1학년은 꽤나 요란했고 슬펐던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그즈음 집안의 사정도 썩 좋지 않았습니다. 안팎으로 매일이 치열한 저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던 제게 '한 구석 비빌언덕'은 절실했습니다.


그때 같은 반이었던, 우연히 첫 번째 짝이 된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은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야기를 할수록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사지에 내몰려있는 제게 그 친구는 유일하게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그 친구의 마음의 템포를 읽기에 저는 어리고 또 여린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 <쇼코의 미소>에서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 이때의 우리 아니 정확히는 저를 누군가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자연스럽게, 또 당연하게 점차 반 안에서 관계의 지평을 넓혀갔지만 제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습니다. 저와의 시간이 줄어가는 친구와 대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제게 사치였고 저는 저 혼자 그 친구와 거리를 두다가 최후통첩처럼 토요일 수업이 끝난 오후, 학교의 벤치로 친구를 불렀습니다.


나와 같지 않은 그 친구의 마음을 폭발적으로 비난하던 제게 친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한 사람에게 10을 다 주던 때가 있었던 것 같아.

근데 그러지 마. 너만 힘들어.

조금씩 나눠서, 1씩 열 명에게 줘."


친구의 말이 제게는 명백한 거절과 단절의 언어로 들리는 순간 저의 서운함과 두려움, 불안함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냐. 난 그렇게 안 할 거야.

나도 너한테 10 주고, 너한테 10 받을 거야.

니가 나한테 10 못 주면, 내 꺼 꿔줘서라도 나한테 10주게 할 거야.

내가 생각하는 관계는 그런 거야."


네가 틀렸어, 너는 비겁한 애야, 넌 진짜 우정을 몰라,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밑엔 나는 네가 너무 필요한데, 너는 어떻게 내게 10이 아닐 수 있니,라는 제 절박함이 들어있었겠지요.


그렇게 돌아가던 친구의 등이 선명한 토요일 오후는 저에게 '관계'를 말할 때 늘 떠오르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상담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단언컨대 '관계'일 것입니다. 친구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직장동료 및 상사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 관계 때문에 아픈 마음들이 흘러 흘러 오는 곳이 바로 상담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내담자들은 묻습니다. 과연 건강한 관계란 무엇인가요. 건강한 관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건가요.

특히 이 질문들은 누군가가 너무 좋은데 그 사람의 온도가 나와 맞지 않는 괴로움에서 출발할 때가 많습니다. 이 질문을 하는 내담자들에게서 고 1 때의 저를 봅니다. 그 애달픔을 보게 됩니다.


그때의 저의 저 절박한 '빚을 내서라도 기어코 10을 받아내려는' 관계가 건강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아프지만 아니요, 인 것 같습니다. 그 관계가 건강하지 않음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돌이켜보면, 제게 그 아이와 저 사이의 '미움의 공간'을 허락할 여력이 없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에겐 마음의 힘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견디게 해 주는데요.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내게 중요한 네가 나를 조금은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나인지, 내가 엄마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엄마와 나를 융합된 대상으로 인식하는 인생 최초의 시기를 거치면 우리는 너와 내가 구별된 욕망을 개체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분리개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는 너와 내가 항상 같은 마음일 수 없다는 이 엄청나고도 중요한,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나에겐 온통 즐거움뿐인 너와의 시간이 네게는 꼭 그 정도는 아닐 수 있다는 사실. 내게 가장 좋은 것을 네게 주었지만 그것이 너의 베스트는 아니라는 그 사실. 이것이 너와 내가 독립된 욕망을 가진 개체임을 알려주면서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하지만 동시에 위기를 선사합니다. 바로 '너는 나를 꼭 좋아하진 않을 수도 있다'는 위기입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위기입니다. 특히 아기 때처럼 자생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생존의 위기를 의미하죠. 내게 중요한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내 생존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마 불안에 질식해 심장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이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데 그중의 하나는 '네가 날 미워할 만한 기회를 차단해 버리려는 시도'입니다. 시도는 다양하지만 이 시도들은 '내가 너를 좋아하면 너는 날 미워할 수 없을 거야'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를 딱, 딱풀처럼 붙여버려서 좀처럼 균열이나 틈은 생기지 않도록 한다면 절대로 미움이라는 것이 우리 사이를 좀 먹을 수 없을 거야. 그러면 나는 안전할 거야. 이것이 내 마음의 생존력을 믿을 수 없는 우리가 의존하고 싶은 대상을 향해 선택하는 전략입니다.


고 1 때의 저는 절박했습니다. 가정환경도, 성적도, 우정도 아무것도 기댈 곳이 없어서 대체 나는 어떻게 이 길에 생존할 수 있을까, 막막했고 그때 유일하게 제가 서있게 하는 버팀목은 그 친구였습니다. 더 정확히는 내 이야기를 차분하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 친구의 눈동자였습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나는 여전히 중요하고 주목받을만한 존재였고, 그래서 사랑받을만했습니다. 세상에 그 눈빛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을 버틸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몰랐던 한 가지는 남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결국 허상이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결국은 내가 나를 그렇게 바라봐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까지 알 여력이 없고, 스스로를 그런 눈빛으로 봐줄 여력은 더더욱 없는 제가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던 유일하고도 미숙했던 그 전략은 단 하나, 우리 사이에 미움이란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이었겠죠. 친구와 나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불편함이나 삐걱댐, 처음과 다르게 자꾸 발견되는 우리 둘의 본질적인 차이들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저는 모두 외면했습니다. 외면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꾸 커져 미움으로 자라날까 봐, 저는 사실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두려움을 버티고 우리 사이에 미움도 불편함도 선선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힘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젠가 끝이 날 관계였을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쉼표가 아닌 온점이 찍힌 관계였겠죠. 여전히 어느 햇빛이 지루한 오후만 되면 그날, 친구의 뒷모습이 떠올라 저를 슬프게 만드는 관계는 아니었겠죠.




가뜩이나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의 사춘기는 고됩니다. 이렇게까지 친구가 중요한 것이었나 싶게 하는, 저와는 참 많이 다른 성향의 아이가 어느 날은 슬프게 울며 말합니다.

"엄마. 걔가 나랑만 놀았으면 좋겠어. 근데 다른 애랑 더 친한 것 같아서 속상해."


아이의 마음을 함께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걔랑 단 둘이만 놀고 싶은 네 마음도 이해해. 그 마음도 중요해.

그치만 다른 친구랑도 놀고 싶은 걔의 마음도 중요해.

그냥, 너희 둘 사이에 공간을 좀 둬 봐. 그러다 보면 다시 또 괜찮아질 거야."


아이가 좀 더 컸다면 아마 이 시를 들려주었겠죠.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그대들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 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느니.

-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칼릴 지브란의 <예언서> 중에서



우리가 함께 하려면 반드시 공간이 필요해. 그 공간이 넉넉하다면, 그 사이로 미움도 슬픔도 아픔도 모두 왔다가 사라질 거야. 선선한 바람처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바람은 결국 지나가게 되어있으니까.


아니 사실은, 가끔은 아직도 토요일 오후의 학교에 서성이는그때의 제게 들려주고 싶은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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