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유독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워하던 내담자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대부분의 친구 관계도 그랬고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였죠. 여러모로 매력 있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순간도 많이 만들 수 있는 센스 있고 배려있는 내담자였기에 시작은 어렵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길게 가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내담자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내담자의 이야기를 통해 내담자의 마음을 천천히 따라가 보니 뜻밖의 두려움 앞에 도착했습니다. 내담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생생한 존재가 아닌 자신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친구도 연인도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은 매력적이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사람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은 더 이상 무언가를 보여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치 미끼상품이 가득한 전단지를 보고 사람들이 몰려오지만 막상 그 외엔 살게 없다고 느껴지는 주력상품 없는 마트 같은 거겠죠.
내담자는 이야기 끝에, 그러고 보니 자신은 물건을 사도 끝까지 쓰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 닳아 없어진 연필심 같은, 제대로 잡기도 어려운 지우개 같은 내 모습이 떠오른다던 내담자는 잠시의 침묵 후,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에게 계속 사랑받을만한 어떤 구석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같아요.
제 노력이 없다면 제게 올만한 사랑은 없는 거죠. “
이어서 내담자가 조금은 볼멘 목소리로 말합니다.
“근데 저만 나쁜 게 아니에요. 제게 사랑을 주는 사람들도, 그 사랑이 영원하지 못하잖아요.
점점 작아지고 멀어지는 사랑을 보느니 그냥 제가 등을 돌리는 게 낫잖아요. 다들 그런 거 아닌가요? “
내담자의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사랑이란 언제나 최고로 반짝거리고 최고로 화려한 불꽃놀이 같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늘 자랑스러운 그런 존재와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관계란 밀물과 썰물 같아서 처음의 화려하고 뜨거운 시절이 영원할 순 없습니다. 때로는 드문드문하고 때로는 초라해지는 그런 관계들의 기나긴 연속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니까요. 조금 온도가 낮아진다고, 처음처럼 화려하지 않다고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화려한 불꽃놀이만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사그라들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불티까지 바라보는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데에도 바로 이 마음이 큰 장애물이 됩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어가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은 계속 변화합니다. 특히 나이가 먹어갈수록 우리의 반짝이고 날카로웠던 어떤 것들이 점점 삐걱대고 고장 나고 느려지는 것을 느끼게 되죠. 과거의 화려하고 모두가 부러웠던 했던 나만 ‘나’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씩 사그라져 가는 그래서 땅에 안착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외면하고 싶어지게 합니다. 조금은 느려지고 아프지만, 그간 나와 함께 애써왔던 나의 마음과 몸을 내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되죠. 이 상태를 상담에선 ‘자존감이 낮다’라고 합니다. 자존감은 시시각각 변하는 가장 생생한 나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때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개념을 말합니다. 그러니 과거의 나만이 아닌, 지금의 나도 충분히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은 바로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는 거겠죠.
앞서 이야기한 내담자에게 들려주었던 시가 있습니다. 사실 상담실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내담자과 함께 보는 시인데요. 바로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큼 우리를 괴롭게 하죠. 그런 우리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그 모든 죽어가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겠죠.
우리는 그저 죽어가는 나 자신을 보듬고 사랑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 어떤 소멸도 쇠퇴도 나의 결함이 아니라고, 영원의 의미를 다시 써보자고 조용히 내담자를 다독이는 것이 상담자인 제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일 것 같습니다.
상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결국 거기에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빼놓기는 어려울 테죠. 물론 상담은 내담자와 상담자가 공동의 치료 목표를 가지고 맺는 일종의 계약적 치료 동맹입니다. 상담자뿐만 아니라 내담자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실하고 꾸준하게 상담에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꼭 필요한 관계이지요. 하지만 이런 상담의 관계가 단순히 PT나 정형외과의 도수치료처럼 열심히 몸만 가면 되는 치료 관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그 자리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점 일 것입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모습에 발견하는 것은 내담자가 얼마나 이상하고 나쁜지가 아닙니다. 내담자의 이야기 속에서 내담자의 진심과 소망을 발견하고, 그리고 나면 그 자리에선 사랑이 피어납니다. 때로는 나 같은 모습, 때로는 인간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을 발견하고 나면 그리하여 상담자는 내담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감히, 내담자의 존재 전체를 단번에 사랑한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내담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사랑하다 보면 꽤나 많은 부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결국 상담에서 치료적 효과를 발견하게 된다면 나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한 사람의 눈빛을 발견했기 때문 아닐까요. 그게 영원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