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이 이야기는 거슬러 1N년 전, 제가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로 올라갑니다. 결국은 냄비받침이 될 운명이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내 새끼인 석사학위논문을 다 마치고 석사 동기 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지하철 안으로 기억합니다. 논문을 마친 저희의 소소한 관심사는 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논문이 온라인 도서관에서 검색될 수 있도록 허용할지 여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입장은 그래도 공개한다,였는데요. 저희가 논문을 쓰면서 많은 다른 선배들의 석사 논문에 기대어 썼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러니까 내 논문 자체는 말도 안 되게 초라하지만 이것이 심리학이라는 거대한 학문 발전의 흐름에 있는 초라한 티끌이 되기 위해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개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언니는 자신은 자신의 논문이 단 한 번도 그런 거대한 흐름에 일부라고 생각한 점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역사의 큰 흐름과 인류의 발전이라는 선(line) 안에 존재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는가에 관한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를 이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 제 석사학위 논문 내용도 가물가물해진 시간이 된 지금, 상담실에 앉아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종종 그 밤의 지하철에서 저희가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곤 합니다.
인류의 어떤 시대가 쉬웠겠냐만은, 지금만큼 우리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절망적인 시간이 과연 있었을까 싶습니다. 노력이 꽤나 정직한 성취를 보장하던 고성장의 시대는 이미 끝나 우리는 부모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뿐일까요. 익명의 연결이 넘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그 어떤 때보다 익명의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 부모는 물론 불과 10년 위의 선배도 내게 딱 맞는 조언을 해주긴 어려운, 그러니까 아무도 우리에게 안전한 지침을 제공해 줄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 무엇이라도 되어야 할 것 같은 이 시대를 우리는 희망 없는 시대라 부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온 존재로 느낄 수밖에 없는 고독감과 허무함은 바로 단절에서 옵니다. 이 넓은 우주에 혼자 떨어져 도저히 앞서 간 발자취를 찾지 못할 때. 나의 이 똑같은 일상이 대체 무엇을 남길지 알 수 없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로도 현재로도 이어지지 않은 덩그러니 떨어진 존재라고 느낄 때 우리는 지독한 고독과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이 상태가 지속된 상태를 우리는 무망감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현재의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쾌락을 느끼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나의 이 별것 없는 일상이 사실은 우리의 조상들도 똑같이 했고, 그 별것 없는 일상의 누적이 지금의 나를 잊게 한다는 믿음. 그래서 나의 별것 아닌 것 같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이 일상이 내 뒤를 오는 누군가를 있게 할 거라는 믿음. 그 모든 것들을 합쳐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보면 희망은 일종의 인류애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내 앞에 있던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온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 누구일지 모르지만, 그게 내가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니더라도 내 뒤를 이어 살 누군가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 그 모든 것들은 사실 내게 당장은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오히려 알 게 뭐야.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이라며 나의 하루를 흥청망청 써버리는 것이 더 현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발휘되어야 하는 박애주의와 이타주의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DNA에 저장되어 있기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금세 무망의 늪에 빠져들고 맙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내담자의 현재 삶에서는 도무지 희망의 꼬리도 찾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한들 다 기만처럼 들릴 때가 있죠. 그렇다면 이 분은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때 저는 우리가 '영원이라는 긴 선' 위에 살고 있는 존재임을 말씀드리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는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생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나를 뽐낸들, 우리는 인류가 써 내려가는 영원이라는 선을 구성하는 하나의 성실한 점에 불과합니다. 그저 우리의 하루를 해내면 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답 없는 삶에 조금은 희망이 생기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