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들>
사람들은 왜 심리상담을 받을까요? 많은 경우의 시작은 아픈 곳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기능에, 존재에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있는 거죠. 하지만 치유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후 어디에 있고 싶은지 물으면, 많은 내담자들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하십니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행복이라니. 이 얼마나 말랑말랑하고 입안에 달콤한 향내가 퍼지는 단어인가요. 그렇지만, 저는 다음 질문을 드립니다.
그런데, 행복이 뭔가요?
조금은 당황하시며 내담자들은 자신만의 답을 내놓습니다. 지금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요.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거요. 제가 원하는 직업을 가지는 거요. 하지만 내담자들도 대답하면서 어딘지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100명의 사람에게 100개의 답이 있을 이 질문에 대해 저는 한 노래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한 내담자께서 소개해주신, AJR의 <Way Less Sad>입니다. 미국출신의 삼형제 밴드인 AJR은 솔직하고 담백한 노래 가사들로 사랑받는 밴드입니다. 내담자가 소개해주신 몇 곡의 노래 중 바로 이 노래의 가사가 저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마치 제 머릿속에 들어왔던 것처럼, 제가 생각하는 행복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은 가사였습니다.
노래의 앞부분에서 더 나은 기분을 위해 이사도 하고 파티도 하는 이들은 후렴에서 노래를 듣는 이들에게, 아니 어쩌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Don't you love it?
좋지, 그치?
Don't you love it?
즐겁지, 그치?
무언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한 이 질문에 이들은 다소 심드렁하지만 결코 시니컬하지 않은 목소리로 답합니다.
No I ain't happy yet
글쎄, 아직 행복하진 않아
But I'm way less sad!
그래도 좀 덜 슬퍼하는 중이지!
그래. 바로 이거야. 어제보다, 지난달보다 덜 슬퍼하는 상태. 인생은 생각보다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돌기에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장소에 다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분명히 상담에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 그 어려움이 반복되고, 마법같이 무언가 괜찮아져서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 장면에서 다시 슬퍼지면 우리는 무너지기 쉽습니다. 어쩌면 그 문제가 주는 슬픔보다 내가 여전히 슬퍼한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행복이란 마이너스가 완벽하게 없는, 그리고 플러스만 존재하는 상태라는 전제가 있는 듯합니다. 내 안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혹은 맘에 들지 않는 결핍의 상태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여야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듣다 보니 어쩐지 동화 <파랑새>가 떠오르는데요.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고,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행복 그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면 우리는 쉽게 무력감을 느끼고 결국 공허해진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는 거죠.
마음먹은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고, 심지어 행복조차 살 수 있다고 부추기는 나르시시즘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이렇게 파랑새 같은 행복을 추구할 때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 하나를 간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어려움은, 슬픔은, 분노는, 절망은 늘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늘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하고 말이죠. 행복은 이런 감정들에 대한 ‘프리패스’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슬픔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분히 주저앉아 나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 슬픔은 필수품입니다. (파티를 할 때 내면의 모습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우는 나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번보다 덜 슬퍼지고 덜 우는 나를 발견하면 됩니다. 지난번 같은 풍경에서의 내가 더 많이 절망하고, 무력해지고, 스스로 혹은 애꿎은 남을 탓했다면 오늘의 나는 좀 더 의연하게 나의 몫을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나의 아쉬운 점과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을 구분해 내기 시작합니다. 무작정 나를 비난하던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터질 것 같던 몸과 마음에 어느덧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들어옵니다.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발견할 수 없는 나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조금은 덜 슬퍼하는 내가 대견하고 덜 버겁게 느껴집니다. 어쩐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조금 더 걸어가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을 저는 행복한 상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언젠가 혼자 여행 내내 썼던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몰입의 순간에 나는 왜 이리 슬픈 걸까.
건네주시는 따뜻한 찻잔을 건네받아
가만히 움켜쥐고 있을 때.
조성진의 연주가 흘러나오던 그 조용한 카페에서
가만히 스피커의 울림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명상 시간에 울려 퍼지던 싱잉볼 소리에 두 눈을 감을 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슬픈 것 같기도 기쁜 것 같기도 하다.
어딘가에서 미처 길어 올려지지 못한
새롭고 신선한 슬픔이 샘솟아 나와서,
생경한 슬픔을 새로이 만나는 것이 기쁜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슬펐던 것 같아.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것이 많은데 이제야 만났구나.
그래 그리고 기뻤구나.
이제야 만난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어서.
이걸 난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은 거구나.
어제보다 조금만 덜 슬프다면 그걸로 충분한 삶을, 우리 함께 행복이라고 불러봅시다. 아마 예전보다 조금 더 행복이 쉽게, 덜 간절하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