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와 농촌교회의 공동체
일제강점기와 농촌교회의 공동체
일제 강점기시절, 백성들의 삶은 착취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조차 사치로 여겨지던 그 암흑기 속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공동체의 마지막 방파제'로 오히려 우뚝 섰습니다. 일제는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고, 그 상징적 압박 중 하나가 바로 신사참배였습니다.
수 많은 신앙인들은 타협을 강요당했지만,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순교는 단순한 종교적 저항을 넘어, 민족의 정신적 자유를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공동체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헌신이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진리에 대한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기독교는민족의 등불로 인식되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농촌에 살았고, 농촌 교회는 소작농과 지주 사이의 불균등한 구조 속 에서 소망의 빛을 이었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공간을 넘어, 교육의 산실이자 경제적 자립 을 돕는 터전이었습니다.
문맹 퇴치 운동, 신기술 보급, 심지어는 협동조합 형태의 경제 활동까지 지원하며 성도들의 실질적인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모여 예배하는 곳 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들이 서로를 돌보고 의지하며 삶의 무게를 나누는 살아있는 공동체였습 니다. 지주-소작인의 수직적 관계를 넘어,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등하게 사랑하고 섬 기는 수평적 관계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의 농촌 중심 선교 전략은 이러한 공동체 형성의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그들은 단 순히 복음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중심으로 “교육·신앙·공동체”의 삼중 기능을 수행하도 록 도왔습니다. 학교를 세워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고, 교회를 통해 믿음을 심었으며, 동시에 물질적 어려움을 나누고 삶을 공유하는 진정한 공동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암울했던 시 대, 교회의 밥상에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함께 앉았고, 함께 눈물 흘리며 서로를 위로했습니 다. 그곳에서 성도들은 단순한 신앙인을 넘어, 피를 나눈 가족과도 같은 유대감을 형성했습니다. 그 뜨거웠던 연보와 공동 식사, 함께 나눈 애통과 위로. 식민 지배의 어둠 속에서도 삶의 방파제이 자 희망의 등대였던 그 공동체의 정신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지 되돌아 보 아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는 진리에 비타협적이며
교육과 경제적 자립을 돕는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었습니다.
다음 회 예고 ㅣ 7월 28일 월요일 연재 됩니다
" 산업화 , 도시화의 도시교회의 명암 "
한국교회 부흥의 시대를 돌아 봅니다.
이촌향도, 농촌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교회는 새로운공동체이자 안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