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n Jun 03. 2020

유후의 향기 02

由布の香り

설거지가 끝나자 료가 돌아왔고 즐거운 하루를 즐길 준비가 된 게스트는 유스호스텔을 나서기 시작한다. 첫 번째 게스트부터 마지막 게스트가 유스호스텔을 나설 때까지 우리는 노래로 그들을 배웅한다. 료는 기타를 치며 나와 토모미는 손뼉을 치며 'county road'를 부른다. 유스호스텔의 이름과 같은 그 곡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으로 떠나는 그들을 위해 노래할 때면 모두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소절을 토모미는 높은음으로 나와 료는 낮은음으로 길게 늘여 불러 보다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그 부분이 끝나고 나면 게스트의 얼굴에는 감동 어린 미소가 번진다. 그들이 현관문을 열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누는 인사 표현이 재미있다. 우리가 흔히 작별인사로 알고 있는 일본어 '사요-나라 さようなら'는 거의 쓰이지 않고 떠나는 사람은 '잇떼키마스 行って来ます', 배웅하는 사람은 '잇떼이랏샤이 行っていらっしゃい'라고 말하는데 직역을 하자면 '다녀오겠습니다'와 '다녀오세요'로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10시가 되기 전 모든 게스트가 유스호스텔을 나섰고 우리에겐 다음 게스트를 위해 그들이 남긴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는 일이 남겨진다. 


"break time~ I love break time!"

"료, 오늘 청소는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지금 빨리 끝내고 쉬지 그래?."

"아냐, 토모미. 지금 이 시간에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떠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 30분만 쉬고 시작하자. 빈은 어떻게 생각해?"

"그래, 커피 한 잔 하면서 잠시 쉬는 것도 좋지."

"들었지 토모미? 커피와 간식거리 부탁해!"

"알았어.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

"아~행복하다."


 청소를 시작하기 전 30분의 휴식은 하루 일과 중의 하나로 료가 가장 즐기는 시간이었다. 1시간도 걸리지 않는 청소가 끝나고 나면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까지 자유시간이지만 아침 6시 30분부터 일이 시작되어 모든 게스트가 유스호스텔을 나서기까지 3시간이 넘게 쉬지 않고 일을 하기 때문에 몸이 휴식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스트가 선물로 가져온 스이-츠(スイーツ 달콤한 간식거리를 나타내는 말로 주로 서양식 과자나 케이크)와 커피를 즐기며 잡담을 늘어놓는다. 


"자~따뜻한 커피와 스이-츠가 왔어요."

"우와, 맛있겠다."

"하카타 토-리몽(博多通りもん)이네. 진짜 맛있겠다."

"응. 후쿠오카에서 온 게스트한테 받았는데 같이 먹으려고 포장도 안 뜯었어."

"역시 토모미! 나도 하카타 토-리몽 진짜 좋아하거든. 도쿄 바나나빵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 

"맞아. 바나나빵은 명성에 비해 맛은 별로인 것 같아."

"고소한 버터크림이 들어간 달콤하고 부드러운 하카타 토-리몽이...음~이 맛이야."

"정말 최고야!"


 하나씩 정성스레 포장된 달콤함을 꺼내어 한 입 베어 물며 정말 맛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 셋을 누군가 봤다면 일본 만화책 속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과장된 어투와 표정 그리고 몸짓까지 동원하여 하카타 토-리몽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목이 마를 때면 향기롭고 따뜻한 커피로 목을 적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빈 오늘은 청소 끝나면 뭐할 거야?"

"왜, 새로운 카페라도 발견했어?"

"아니, 아쉽지만 오늘은 장부 정리를 해야 해서 외출할 시간이 없어."

"안됐군. 난 아르테지오(Artegio)에 갈까 하는데."

"또 가려고? 거기 질리지도 않아? 입장료도 600엔이나 하는데."

"응.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클래식 음악 들으면서 그림 감상하다가 소파에 앉아 공상에 빠지기도 하고. 그래서 공상의 숲이라고 불리기도 하잖아."

"하긴 빈은 디자인 일을 하니까..."

"매번 입장료 600엔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유후인에서 입장료 값어치를 하는 몇 안 되는 갤러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그건 그래. 샤갈뮤지엄도 그렇고 스테인드글라스 뮤지엄은...어휴~"

"하하하! 한 번은 가볼만하지 뭐."

"료, 이제 힘을 내서 시작해 볼까?"

"그래. 방 3개만 치우면 되니까 11시까지 끝내자고!"

"그럼 난 세면 대하고 거울부터 닦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응. 난 온천장부터. 토모미는 침구 정리하고 청소기로 방청소 부탁해."

"101, 204, 205호지?"

"어, 도미토리룸 3개."


 료의 말대로 11시가 되기 전에 모든 일을 마쳤고 나는 욕실로 들어선다. 유스 호스텔에는 샤워장과 함께 온천탕이 있는데 유후인에서도 좋기로 유명한 푸른 온천수가 가득 찬 욕탕을 24시간 무료로 즐길 수 있다. 한 달이 넘게 이용하고 있지만 온천탕에는 딱 한 번, 그것도 아주 잠시 동안 몸을 담가보았을 뿐이었다.

 언젠가 료가 내게 온천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여름에는 더워서 몸을 담그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알몸이 한 곳에 담겨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기 때문이다. 지난 일본 여행 때 어쩔 수 없이 방문했던 온천은 남녀혼탕이었는데 구석에 처박혀 있던 봉투처럼 구겨지고 늘어진 가슴이 배까지 내려앉은 할머니가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던 경험은 입에 담기도 싫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좋았던 온천 경험은 전 여자 친구와 시모다(下田)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료칸에 머무를 때였다. 바닷바람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 노천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두워진 하늘 아래 홀로 알몸이 되어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무엇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잎사귀와 빗방울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들을 흠뻑 받아들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지만 전신을 온천수에 담그지는 않았다. 가슴 위로는 시린 겨울을, 아래로는 뜨거운 여름을 느끼며 수면을 기준으로 내 몸이 분리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비 내리는 겨울의 노천탕을 처음으로 느낀 그때가 그녀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 느낌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와의 첫 만남보다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 몸에 비해 한 없이 작은 나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몸 구석구석을 씻는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를 외면한 채 선풍기 바람에 몸을 말리고 욕실을 나섰다. 이제야 몸이 확실하게 깨어난 것 같았다. 얇은 유카타(浴衣 얇은 면소재의 여름용 기모노)를 걸치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 시원한 우롱차를 들이켰다. 저 멀리 산에 둘러싸인 유후인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미칠 듯 파란 하늘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전 01화 유후의 향기 0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