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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Jun 08. 2020

유후의 향기 03

由布の香り

반바지와 반팔티에 샌들을 신고 호스텔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온다. 아르테지오에 간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인 매너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면 시선이 매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기분까지 상하게 되는데 내가 그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 몇 년째 신고 있는 가죽 샌들을 벗어놓고 하얀 스니커즈를 신는다. 하얀 구두는 어렵지만 하얀 스니커즈는 어떤 옷차림에도 잘 어울리고 산뜻한 느낌이 나서 좋다. 커다란 헤드폰으로 귀를 감싸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유스호스텔에서 시내방향으로 100미터 정도 내려가다 보면 왼쪽으로 고급 료칸과 갤러리, 카페 등이 조용하게 자리하고 있는 토리고에(鳥越) 지역으로 들어서는 길이 보인다. 대형버스에 몸을 싣고 반나절 코스로 유후인 시내를 대충 훑어보는 패키지 관광을 한다면 절대로 올 수 없는 곳이며 그들이 이 곳까지 오지 않아서 이 곳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감사해하고 있다. 비밀의 화원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욕심이 조금 묻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보다는 지키고 싶은, 더 오래도록 누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내가 유후인에 오래 머물렀던 이유 중의 하나가 토리고에 지역의 비현실적인 고요함과 평화로움이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낯설고 당황스러워 두려움으로까지 다가오기도 했지만 세상에 이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후 나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이 곳을 즐기게 되었다. 듣고 있던 음악이 끝날 때 즈음 아르테지오에 도착한다. 


아르테지오는 유후인의 최고급 료칸 산소-무라타(山荘無量塔), 소바 식당 무라타 후쇼-앙(無量塔不生庵), 초콜릿샵 theomurata, 롤케이크 전문점 B-speak 등을 운영하는 무라타 프로듀스(無量塔プロヂユース)소속의 갤러리로 '공상의 숲(空想の森)'이라고도 불리며 정기적으로 쳄발로(cembalo) 연주회가 열리기도 한다. 전시된 작품은 주로 갤러리 소장품으로 샤갈, 피카소, 앤디워홀 등 대가들의 흔적도 만날 수 있으며 자연과 어우러진 모던한 디자인의 갤러리 자체가 훌륭한 작품이다. 이 곳에 들어설 때마다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하는 그림들을 마주할 때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흐른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흐르고 있는 클라식 음악이 그들의 표정을 풍성하게 하고 있었기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만남도 아니고 많지도 않으니까. 예술 관련 서적으로 가득 찬 서재로 향한다. 아르테지오에 올 때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 곳에는 항상 나를 반겨주는 소파가 있다. 거기에 앉아 책을 보기도 하고 음악에 취해 눈을 감은 채 공상에 빠져보기도 하고 그러다 잠시 잠들고. 내겐 그 어떤 곳 보다 편안한 휴식처였다. 오늘도 난 서재의 소파에 기대어 오랜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다가온 허기가 나를 갤러리 밖으로 불러 내었다. 내리막길 정면으로는 수공예품을 전시 판매하는 카페가 있고 양 쪽으로는 유후인 소바(そば 메밀국수)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무라타 후쇼-앙(無量塔不生庵)과 이즈미(泉)가 자리하고 있다. 왼편으로 위치한 무라타 후쇼-앙은 모던한 감각의 건물이 단아한 자태를 풍기고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즈미(泉)가 정겨운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 미소에 이끌려 나는 오늘 점심을 이 곳에서 먹기로 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발길을 돌린 적이 수 차례 있었지만 한 번은 먹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오늘은 그 미소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가지 메밀국수와 메밀로 만든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메뉴를 주문하고 창가로 슬며시 내려다보이는 유후인 시내를 마주하고 있으니 자루소바(ざるそば)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멋스러운 자기 그릇에 조금씩 담긴 반찬과 함께 서빙된 자루소바는 대나무판에 담긴 메밀국수를 작은 그릇에 덜어 쯔유(つゆ 국수를 찍어 먹는 간장소스)와 함께 먹는 것이었는데 직접 갈아먹을 수 있는 강판과 함께 제공된 와사비가 예사롭지 않았다. 언젠가 신선한 와사비를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은 나무판에 위에 덧 댄 상어가죽에 갈아먹는 거라는 글을 읽고 과장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그 말이 이해가 갔다. 조그맣고 동그란 돌기로 이루어진 상어가죽에 신선한 와사비를 천천히 갈아 자루소바에 곁들인다. 이 과정은 신선함과 맛을 위함은 물론 소바를 즐기기 위한 일종의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일식당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곱게 갈아진 것과 달리 갈린 뿌리의 입자가 보이는 와사비는 얇게 썰린 파와 함께 알싸한 풍미로 자루소바와 어우러져 입안으로 퍼졌다. 음식을 내는 방법부터 먹는 방법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그들의 정신에 감탄할 때 즈음 두 번째 메밀국수 오로시소바(おろしそば)가 서빙되었다. 자기 그릇의 쯔유에 잠긴 소바 위에는 가쯔오부시(かつおぶし 가다랑어포)와 오로시다이콘(갈은무우) 그리고 얇게 썰린 파가 멋스럽게 얹혀있었다. 조금씩 담긴 국수가 아쉬웠었는데 따뜻한 메밀 육수에 담긴 나뭇잎 모양의 메밀떡을 디저트로 즐기고 나니 뱃속은 풍요로움으로 넘쳐 흘렀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 역사 깊은 소바를 먹고 숲길을 걸어 내려오니 우측으로 무료 족욕장이 보인다. 이 곳 역시 내가 자주 찾는 곳으로 그리 넓진 않지만 야외에 마련된 파아란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차가운 음료를 곁들이면 피로는 작은 땀방울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증발할 피로도 없었고 점심을 먹은 직후라 유후인 시내를 향해 계속 걷는다. 숲 속에 비밀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여러 건물들을 지나치고 토리고에 지역과 유후인 시내의 경계선인 도로를 건너 킨린코(金鱗湖)에 도착한다. 항상 관광객으로 붐비는 킨린코는 햇살에 반사된 물고기 비늘이 금빛으로 반짝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누군가에게 킨린코의 새벽안개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언젠가는 보겠지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아침 일찍부터 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휴일에나 가능하지만 휴일이 되면 몸은 좀처럼 이불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잠시 새벽안개에 둘러 쌓인 킨린코를 상상해보지만 눈부시게 화창한 풍경이 이미 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호수와 맞닿은 카페에 앉아 시원한 지역맥주를 마시며 사진 찍기 놀이를 하는 관광객을 구경하기도 하고 가끔씩 그들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카페 2층에 위치한 샤갈 뮤지엄 역시 유후인의 명소로 한 번 가보기는 했지만 오래전 가보았던 니스의 샤갈뮤지엄에 비해 빈약한 전시작품에 실망한 터라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그래도 개인의 소장품으로 이루어진 갤러리라고 하니 그 노력에는 박수를 보낸다.


 온갖 상점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유노츠보요코초(湯の坪横丁)를 거닐며 주민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관광객 마냥 이 곳 저곳을 기웃거려본다. 이 곳은 정말 다양한 상점이 몰려 있는데 지역 특산물을 파는 상점이나 카페 레스토랑 이외에 누구나 아는 각종 캐릭터가 프린트된 상품이 유후인의 것처럼 둔갑되어 판매되는 것이 아쉽고 눈에 거슬렸다. 료 역시 그러한 상점들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화창한 금요일 오후, 유후인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그 거리를 메웠고 난 그곳을 벗어나 논밭이 시원하게 펼쳐진 곳에서 음악을 흘리며 걸었다. 저 멀리 구름을 두르고 있는 유후다케(由布岳)가 내게 손짓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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