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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Aug 03. 2020

유후의 향기 05

由布の香り

처음 만난 그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피로에서 벗어난 그녀의 환한 얼굴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나자 그녀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아쉽고 허전했지만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계단을 오르고 있는 그녀를 부른다.


"저기요."

"네?"

"근처에 좋은 산책 코스가 있는데 거기 가보시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래요? 음...가보고 싶긴 한데 어둡고 길도 모르고. 혼자 가기는 좀 그렇네요."

"저랑 같이 가요. 맥주 한 잔 마셨더니 더워서 저도 찬 바람 쐬고 싶거든요."

"그럴까요? 그럼."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오르던 계단을 내려와 나와 함께 호스텔 밖으로 나섰다. 그녀를 나의 비밀의 정원, 토리고에 지역으로 안내하며 유후인에 대한 설명과 농담 등을 늘어놓았다. 료와 함께 게스트들을 이끌고 이 지역을 몇 차례 오가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어느새 귀에 내려앉아 입안에서 절로 흘러나왔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이 지역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끔씩 그녀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다며 미소를 보였는데 그 미소는 나를 쉬지 않고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낯선 이의 미소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아직 여름인데 숲 속이라 그런지 서늘하네요."

"네. 서늘하면서도 상쾌하죠."

"공기가 정말 다른 거 같아요."

"도시에서 왔으니 당연히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저도 처음에 여기 왔을 때 다른 세상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아, 좋다…"


 그녀의 좋다는 말 한마디에 뿌듯해졌다. 한 시간 전에 만난 그녀가 좋아하는 무엇인가를 내가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을까? 글쎄. 하여간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산책을 하다 보니 그녀의 눈높이가 내 것보다 많이 낮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키가 크네요."

"여자치고는 큰 편이죠."

"멋있어요."

"네? 키 큰 게 멋있다고요?"

"네. 전 키 큰 여자 보면 왠지 멋있는 거 같아요."

"보통 남자들은 작고 아담한 여자 좋아하지 않나?"

"그렇다고들 하는데 전 키 큰 여자가 좋아요."


 이 말을 하고 나서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어설프게 고백을 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홀로 느낀 어색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서둘러 대화의 화재를 바꾸었다.


"유후인은 어떻게 알고 왔어요?"

"유후인 유명하잖아요. 특히 여성들한테 인기가 많죠. 온천 지면서 이쁜 카페나 식당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우선 다른 지역에 비해 가깝잖아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이 곳에 왔는데 알고 보니 유명한 온천지더라고요."

"좋은 온천 많이 다녀왔어요?"

"아뇨, 유스호스텔 온천탕 빼고는 안 가봤는데요. 전 온천 별로 안 좋아해요."

"이상하네요. 온천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이 곳에 한 달이 넘게 있고."

"온천 말고도 좋은 곳이 많거든요."

"그래요? 그럼 좀 알려주세요. 전 3일밖에 시간이 없어서 많이 가볼 순 없겠지만."

"차 있으면 유노히라온센(湯平温泉)이나 쯔카하라고원(塚原高原) 다녀오면 좋을 텐데."

"거긴 어디예요?"

"유노히라(湯平)는 오래된 온천 마을인데 유후인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긴 하지만 역에서부터 마을까지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요. 걷기에는 너무 멀고 택시 타고 가기엔 비싸고."

"버스는 없어요?"

"있긴 한데 하루에 몇 번 안 다녀서 시간 맞추기 어려워요. 그래서 저도 지난번에 역에서부터 유노히라까지 걸어갔다 온 적이 있는데 두 번은 못 할거 같아요."

"온천은 어땠어요? 좋은데 많아요?"

"글쎄요. 전 무료 족욕장에 발만 담가봐서…"

"하긴… 온천 안 좋아한다고 그랬지."

"마을은 정말 이뻐요. 마을 입구부터 언덕으로 길이 이어져 있는데 300년 이상 된 돌길이에요. 그 양쪽으로는 오래된 료칸하고 온천장이 몰려 있어서 굉장히 정겹고 푸근한 느낌이에요."

"좋겠다. 난 온천 정말 좋아하는데. 게다가 온천 마을이라니 저한텐 천국 같은 곳이겠어요."

"그렇겠네요."

"두 번째 말했던 곳은요?"

"쯔카하라(塚原)는 유스호스텔 뒷 쪽으로 산길 따라서 쭉 가다 보면 나오는 고원이에요. 그 안에 부티크호텔, 온천,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있는데 한적하고 좋아요. 이 곳 토리고에와는 또 다른 분위기예요."

"가보고 싶다…"

"다음에 유후인을 다시 찾게 되면 그때는 꼭 가봐요. 이번에는 3일 일정이니까 이 근처만 봐도 모자라겠어요."

"네. 다음에 오게 되면 일정을 좀 길게 잡아야겠어요. 하여간 내일이 너무 기대돼요."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숲 속 안쪽으로 위치한 산소-무라타(山荘無量塔)에 도착했다. 이 곳에 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땅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발걸음을 따라오다 보니 여기다.


"여기가 제가 아까 얘기했던 최고급 료칸중의 하나인 산소-무라타고요. 휴일이나 주말에는 투숙료가 하루에 7만엔이래요. 정말 비싸죠? 그리고 정면에 불 빛이 보이는 곳이 료칸 안에 있는 탄즈바(Tan's bar)라는 바예요"

"멋지다. 가볼까요?"

"아쉽지만 탄즈바는 투색객만 이용할 수 있어요. 아침부터 오후까지 카페로 운영되는데 그때는 들어갈 수 있지만 바로 운영되는 이 시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겠죠."

"그 말 들으니까 더 가보고 싶네요. 원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잖아요. 막상 가보면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그 전에는 모르니까."

"다음에 돈 많이 모아서 이 료칸에 머무르면서 천천히 즐겨봐요."

"그래야겠어요."

"저도 다음에 유후인에 오게 되면 이 곳에 하루라도 머물러보고 싶어요. 지금은 긴 여행 중이라 경비가 빠듯해서."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렇게 큰돈을 써가면서까지 여기에 머무는 사람들은."

"웃긴 이야기지만 돈 많은 일본 아저씨들이 바람피우러 온대요. 워낙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 있는 지역이라 남들 신경 안 쓰고 즐기는 거죠."

"그럼 지금 저 안에 있는 사람들 바람피우고 있는 거네요."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거지,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저도 그냥 일본 친구한테 우스개 소리로 들은 얘기라..."

"돈이 많은 사람들은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렇지 않은 일을 더 많이 할까요?"

"글쎄요. 이기적이어서, 단순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남들 신경 안 쓰고 자기가 번 돈 자기가 쓰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의도나 방법이 너무 유치하고 본능적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것을 모르는 거죠. 더 나쁜 사람은 그걸 알면서도 외면하는 사람이고요."

"돈이 많이 생기면 뭐가 가장 하고 싶어요? 정말 돈 상관없이 아무거나 할 수 있다면."

"우선 저기 밝게 빛나는 별들 보이죠? W 처럼 보이는 5개의 별들."

"네. 카시오페이아."

"어, 잘 아시네. 전 이 곳에 와서 처음 봤어요. 저 별들. 사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별 볼일이 그리 많지 않잖아요. 하여간 전 그렇게 큰돈이 있다면 저 별들 만나러 갈 거예요."

"카시오페이아가 어떤 별자리인 줄은 알아요?

"아뇨. 이 곳에 와서 자주 보게 되어서 그냥 한 번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요."

"카시오페이아는 페니키아 왕국의 왕비이자 안드로메다의 어머니였는데 자만심과 허영심이 강해서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게 됐어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재물로 바쳐진 그녀의 딸 안드로메다는 그녀에게 반한 페르세우스에게 구출되었지만 카시오페이아는 죽어서도 포세이돈의 분노를 피할 순 없었죠. 포세이돈이 그녀를 별자리로 만들어 천구의 남극을 떠돌게 했대요."

"별자리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대학 다닐 때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그곳은 닿을 수 없는 곳이니까. 궁금했거든요.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지금 저 탄즈바처럼요."

"하하하. 탄즈바가 새로운 별자리가 됐네요."

"그러게요."

"미나씨는 뭐가 하고 싶은데요?"

"저는 우선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날 거예요."

"어디로요?"

"구체적으로 정해진 곳은 없지만 캠핑카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 싶어요. 그러다 지치면 편안한 휴양지에서 쉬다가 또다시 여행하고.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면허는 있어요?"

"그럼요. 장롱면허지만 7년 전에 땄는걸요."

"우와, 오래됐네요. 난 작년에 땄는데."

"늦게 따셨네요."

"네, 어려서부터 멋진 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그 멋진 차를 살 수 있을 때 면허를 따겠다고."

"멋진 차 사셨나 봐요?"

"아뇨. 멋진 차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차도 없어요."

"그럼 면허는 왜 땄어요?"

"작년에 서울에서 뉴질랜드 친구 한 명을 만났어요. 디자인 전시회에서 만나 친해지게 되었는데 하루는 그 친구가 몽고 여행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동차로 몽고 여행을 해보고 싶은데 아직 면허가 없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죠. 나도 면허가 없으니 면허 따고 내년 여름에 같이 여행하자고."

"재밌네요. 면허를 딴 이유가. 그래서 몽고 여행은 다녀왔어요?"

"아뇨. 전 정말 가려고 준비했는데 그 친구가 그 사이 여자 친구가 생겨서 아직도 면허가 없대요. 사랑하느라 면허 딸 시간이 없었던 거죠."

"그 친구한테는 몽고 여행보다 사랑이 먼저였나 보네요."

"네. 아쉽지만 이해는 가요. 지금쯤 몽고고원 어딘가를 달리고 있어야 하는데 유후인 숲 속에 있네요."

"몽고고원을 달리는 것도 멋지겠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숲 속에 있는 것도 좋지 않아요?"

"물론이죠."

"하늘 좀 봐요. 유후인 하늘엔 별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밝은 것 같기도 하고요."

"난 여기서 별똥별도 봤는데."

"진짜요? 소원은 빌었어요?"

"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요."

"소원을 빌었다면 뭔지는 몰라도 이루어지겠네요."

"그렇겠죠."


 얼마 전 유성우가 내린다고 해서 저녁 일과가 끝나고 투숙객들과 함께 호스텔 맞은편 언덕에 간 적이 있었다. 언덕길에 등을 대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별똥별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나 고요하고 평화롭던지. 시간이 멈춰버린 줄 알았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별빛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한 줄기 빛이 하늘을 갈랐다.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오래도록 남을 순간이었다.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내가 소원을 빌었는지. 빌었다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다음 빛을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모래알 같이 작고 반짝이는 별들이 하늘에 길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아녜요. 저도 즐거웠어요."

"그럼 내일 아침식사 잘 부탁드려요."

"네. 맛있게 해 드릴게요."

"잘 자요~"

"네. 좋은 꿈 꿔요."


 1시간이 조금 모자란 시간 동안 그녀와 토리고에 지역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게스트들이 식당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 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처럼 료가 있었다. 오늘은 축구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헤이 빈, 어디 갔다 왔어?"

"어, 게스트랑 산책 다녀왔어."

"게스트? 어떤 게스트?"

"'킴'이란 한국 여자 있잖아."

"아, 그 사람 왔구나. 난 늦어지길래 안 올 줄 알았지."

"후쿠오카에서 버스를 놓쳤대."

"oh, my god!"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내일 도착한대."

"알았어. 이리 와서 앉아. 우리 지금 재밌는 얘기하고 있어."

"오늘은 그냥 일찍 자려고.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럼.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고."

"응. 잘 자."


 한낮에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도 피곤했다. 만난 지 두 시간도 채 안된 그녀 때문이었을까? 가슴이 답답한 것 같기도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잠이 들었다. 그리곤 꿈을 꾸었다. 멋진 자동차를 타고 몽고고원을 달리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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