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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Sep 12. 2020

유후의 향기 07

由布の香り

우린 비 내리는 한적한 숲을 지나 컨트리로드를 향해 걸었다. 가끔씩 그녀의 커다란 우산과 내 우산이 부딪혀 그녀의 우산을 함께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없었는지, 지쳤는지, 서로 다른 공상에 빠져 있었는지 그저 서로의 발걸음만 옮기고 있던 터라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유스호스텔에 도착해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고 난 옷을 갈아입고 주방에 들어선다.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걸친 채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료가 말을 건넨다.


"빈, 일찍 왔네. 오늘은 어땠어?"

"좋았지 뭐. 그냥 한가하게 보냈어."

"매일 너무 한가하게 보내는 거 아냐?"

"여행 중이잖아."

"하긴 여행 중이니까... 아, 202호 게스트는 왔어?"

"어. 왜?"

"한 명 더 온다며? 저녁식사는 둘 다 할 거래?"

"아니. 오기로 한 친구가 바빠서 못 온대. 그냥 혼자 먹는데."

"아, 그래?"

"응."

"자, 그럼 오늘 저녁 식사도 맛있게 해 볼까?"

"당연하지. 벌써부터 배고픈 게스트도 있으니 빨리 준비하자고."

"그래? 누가 배고프데?"

"아니, 그냥 그럴 수도 있잖아."


 저녁식사가 테이블 위에 잘 차려졌고 난 안내방송을 했다. 비 내리는 저녁 추위를 녹여 줄 따뜻한 밥상이 차려졌으니 마음껏 즐기라고. 보통 정해진 멘트가 있지만 오늘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아침과는 반대로 그녀가 가장 먼저 식당으로 내려왔고 곧 모든 게스트들이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와 짧은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난 주방으로 돌아와 료와 저녁식사를 했다.


"아~맛있다. 역시 직접 해 먹는 밥이 최고야."

"맞아. 그리고 비 내리는 날 먹는 미소시루(みそ汁 일본식 된장국)는 정말 맛있어."

"오늘 밤은 어디로 나가볼까나?"

"나이트투어 가려고? 아직 비 오지 않아?"

"이 정도 내리는 비가 나의 나이트투어를 방해할 순 없지. 그리고 오늘은 게스트도 많지 않아서 차 한 대로 움직일 수 있어."

"유후다케(由布岳) 맞은편에 언덕 있잖아. 야경 보러 자주 가는 곳. 거긴 어때?"

"글쎄. 오늘 같은 날씨에 야경이 잘 보일지 모르겠네."

"아니면 그냥 식당에서 식사 끝나고 얘기하면서 놀던지."

"그것도 좋고. 내일은 뭐할 거야?

"특별한 거 없는데, 왜?"

"그래도 휴일인데 어디라도 다녀오지 그래?"

"휴일? 아, 내일 휴일이구나… 잊고 있었네."

"하, 이제 휴일 챙기는 것도 귀찮은 거야? 아니면 나랑 일하는 게 그리 즐거운 거야?"

"하하하. 둘 다."

"이제 근처에는 안 가본 곳 없지?"

"그런 거 같아. 그래도 다른 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유후인 근처를 서성이는 게 좋아."

"벌써 한 달째 인데도?"

"응. 아직 질리지 않았어."

"하긴 나도 이 곳에서 지낸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유후인이 좋아. 처음 느낌처럼 말이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살아가는데 뭐가 부족하겠어?"

"맞아. 가끔은 너처럼 자유롭게 여행 다녔던 시간들이 그립긴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지금은 더 좋아. 넌 아직 모르겠지만 가족이 생기면 알게 될 거야. 이 기분."

"잘 모르긴 해도 너희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것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가끔 부럽기도 하고."

"그럼 곧 가족을 만드는 건 어때?"

"하하. 그래도 아직 나한텐 홀로 여행 다니는 게 어울려."


 5분 만에 저녁식사를 마친 료는 주방을 나섰다. 밥 먹는 시간이 가장 아깝다는 그는 보통 2-3분, 길어야 5분 안에 식사를 마친다. 반면 나는 이 곳에 온 뒤부터 천천히 먹는 습관을 들여 그가 떠나고 나서도 한 참 동안 저녁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끝낸 게스트들과 료는 나이트 투어에 나서고 난 토모미와 설거지를 마치고 식당에서 시원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름도 이제 다 지났네."

"응. 좋았어, 이 번 여름은..."

"여름휴가도 못 갔는데?"

"난 이 곳에 오는 게스트들만 봐도 매 번 휴가 온 느낌이야. 새롭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겠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곳으로부터 오니까."

"하루를 마치기 전에 이렇게 식당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정말 즐거워.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건 아니지만 그들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 경험이 되는 것 같다니까. 그렇게 따지면 난 전 세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야."

"여행 얘기처럼 재밌는 얘기도 없지."

"맞아. 여행은 어쨌든 즐거우니까."

"가끔 그렇지 않기도 해."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간 새로운 경험이었어. 유쾌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나쁜 느낌도 아니었고."

"무슨 말이야?"

"8년 정도 전이었을 거야. 난 그때 졸업을 앞둔 학생이었고 홀로 여행 중이었어. 모두들 인턴쉽이다 뭐다 사회생활을 위한 준비로 바빴지만 내겐 흥미 없는 일들이었거든. 하여간 난 프라하에 있었는데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어. 비록 싸구려 호스텔에 묶으며 길거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어도 난 자유롭게 여행 중이었으니까."

"그럼. 학생 때는 다 그렇게 여행하잖아. 여비가 넉넉한 학생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냥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고. 여행 자체가 즐거운 거지."

"그 해 생일을 그곳에서 홀로 맞았어. 뭘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무작정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어. 생일이니까. 한 번 정도는 무리해도 되겠거니 하고. 애피타이저로 시작해서 메인디쉬 그리고 디저트까지 다 먹고 팁까지 후하게 챙겨 주고 나오는데 돈이 너무 아까운 거야. 맛도 없었고 서비스도 엉망이었고. 간판을 보니 영국 레스토랑이더라고. 프라하에 있는 영국 레스토랑. 하여간 한참 동안 거리를 헤메이다 강변에 앉아 맥주를 마셨어. 그렇게 프라하에서 맞이한 생일을 자축하는데 묘한 기분이 드는 거야. 즐거우려 했지만 약간은 그립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내가 이 먼 곳까지 와서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니까. 그 순간 시뻘건 저녁노을이 눈 앞에 펼쳐졌지만 오랫동안 바라볼 순 없었어. 너무 아름다웠거든. 눈부시도록. 어느새 시야가 흐려졌고 그렇게 소리 없이 흐르던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어."

"너도 모르게 많이 외롭고 힙들었구나." 

"신기한 건 그러고 나니까 모든 게 다시 즐거워 진거야. 갑갑했던 속이 갑자기 뚫린 느낌이랄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으니까. 하여간 아주 커다란 경험이었겠네."

"응.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고 아직까지도 다시 느껴보지 못했어."

"다시 느끼더라도 처음 그 느낌은 아닐 거야. 처음은 한 번뿐이니까."

"맞아. 처음은 한 번 뿐이지.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거고."

"내일부터 휴가인데 어디 안가? 벳부(別府 유후인 근처의 해안도시)나 뭐 근처 어디라도."

"아직 별생각 없어. 그냥 푹 자다가 일어나서 배고프면 먹고 어디 가고 싶으면 가고."

"그게 제일 편하긴 하지."

"게으름인지 여유인지 모르겠지만."

"게으름이면 어때. 휴일인데."

"응."

"이 곳 생활은 어때?"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여유로워졌다는 거야. 서두르지 않고."

"중요하지. 여유를 갖는 거. 나도 항상 여유로워지려고 노력하지만 어느새 서두르고 있고  여유를 즐기고 있으면 내가 너무 게을러진 거 같고. 어려운 것 같아."

"일 끝나고 지금처럼 차 마시며 대화하는 건 여유겠지?"

"근데 그 여유가 이제 끝났네."

"응?"

"애들도 재우고 나도 자야지."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응. 잘 자고 내일 보자고."

"그래.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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