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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Sep 11. 2020

유후의 향기 06

由布の香り

오늘도 어김없이 7시 30분이 되기 전 식당에는 게스트들의 아침식사가 차려졌고 난 안내방송을 한다. 열 명 정도 되는 게스트들 중에 그녀가 가장 늦게 식당에 나타났다. 아침에 보니 더 하얀 얼굴로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잘 잤어요?"

"네. 근데 아침을 이렇게 일찍 먹어요? 난 더 자고 싶은데."

"길고 즐거운 하루 보내시라고. 피곤하면 밥 먹고 좀 더 자요."

"아뇨. 피곤하진 않은데 여행 와서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 이상해요. 게을러지고 싶은데."

"아침 먹고 나면 나아질 거예요."

"좀 전에 방송은 뭐예요? 깜짝 놀랐어요."

"아침식사 준비되었다는 안내방송인데 제 일과 중 하나죠."

"네? 아까 그거 직접 한 거예요?"

"네. 제가 한 건데요. 이상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목소리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서요."

"그랬나? 하여간 아침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잘 먹을게요."


 주방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한다. 뭔가 씹히기는 하는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다르게 느껴졌다던 내 안내방송 목소리가 궁금할 뿐이었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오는 게스트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 곳에서는 식사가 끝나면 자기 그릇을 직접 치운다. 그리고 잘 먹었다는, 맛있었다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예의 바른 그들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식사도 가장 늦게 끝내고 그릇도 치우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 곳에 처음이니까, 일본 사람이 아니니까. 그릇을 치우러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간다.


"다 드셨어요?"

"네. 근데 잘 안 먹히네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여기서 음식 남기는 거 실례인데."

"진짜요? 못 먹겠는데 어떡하죠?"

"제가 남은 음식 안 보이게 잘 버리고 치울게요."

"고마워요."

"오늘 어디에 갈지 정했어요?"

"아뇨. 그냥 시내 구경하다가 차 한잔 마시면서 생각해보려고요."

"좋은 생각이네요."

"우선 방으로 돌아가 조금 더 누워야겠어요."

"그래요. 혹시 나가기 전에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요. 난 11시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네. 나중에 봐요."


 나중에 봐요란 말이 얼마 동안 머릿속에 머물렀다. 그냥 기약 없이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내게는 마치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설거지를 하고 객실 청소를 하고 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혹시라도 식당에 그녀가 내려와 있을까 둘러보았지만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보통 이 시간에 호스텔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료 그리고 토모미뿐이니까. 몸에 엉겨 붙은 땀과 실망을 짧은 샤워로 씻어내고 낮잠을 즐길까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외출을 하기로 한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빈, 어디 가려고?"

"응, 동네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게."

"비 오니까 우산 가져가."

"지금 비와?"

"어. 오늘 하루 종일 비 올 거라는데."

"가을이 오려나."

"그런 것 같아. 한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아침이나 밤에는 많이 싸늘해졌잖아."

"오늘 저녁식사는 몇 인분이야?"

"오늘은 11인분."

"주말인데 별로 많지 않네. 하긴 휴가철도 지났으니까."

"응. 잘 다녀와."


 난 우산을 펼쳐 들고 유스호스텔을 나섰다. 헤드폰을 목에 걸치고 나왔지만 음악을 듣지는 않았다. 오늘은 빗소리가 음악이니까. 나무가 울창한 토리고에 지역을 지날 때에는 음악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눈에 익숙한 풍경들을 지나 유후인 시내에 도착한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유후인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이 거리에 꼭 들르니까 혹시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지만 굵어진 빗방울로 거리는 거의 비어있었다. 운동화에 스며든 빗물로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쯤 한적한 코토코토야(ことこと屋)에 들어선다. 이 곳은 유후인 지역에서 나는 과일로 만든 수제잼이 유명한 카페로 근처에 잼 전문점도 운영하고 있었다. 커다란 창가에 앉아 홍차와 블루베리 스콘을 주문한다. 유후인의 어느 카페에서나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이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서 흐르고 있었는데 모던하게 새로 지어진 카페 안에 자리하고 있는 고급 스피커는 왠지 어색했다. 산소-무라타(山荘無量塔) 근처에 위치한 카페 코-히-하마노(コーヒーHamano)의 고풍스럽고 따뜻한 분위기에 더 잘 어울린다. 한동안 그 분위기에 매료되어 그곳에서 클래식 음악만 듣곤 했는데 다른 곳에도 좋은 카페가 많다는 토모미의 말을 듣고 시간이 날 때마다 카페 탐험에 나서게 되었다.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착한 얼굴의 아주머니가 따뜻한 홍차와 블루베리 스콘을 가져다주었다. 보통 차나 커피를 마실 때 설탕을 넣지 않지만 오늘은 달콤하게 먹고 싶었다.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버터향이 진한 스콘 위에 블루베리잼과 생크림을 얹어 먹으니 차가워졌던 몸이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난 그저 가끔씩 지나가는 창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힘 없이 유스호스텔로 돌아오는 길. 비는 그칠 줄 몰랐고 몸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족욕장에서 몸을 녹이기로 한다. 빗물에 젖어 부은 발을 푸른 온천수에 담그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일본 현악기 소리가 나를 달래 주었고 어느새 난 추위를 잊고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손에 쥐고 있었다. 물속에 잠긴 다리가 너무나 짧게 보여 혼자 웃기도 하고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온천이 신기해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니 맥주 캔은 점점 가벼워졌다. 이 평화로움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는데 커다란 우산을 들고 누군가 다가왔다. 그 누군가가 그녀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난 다시 차가운 기운에 휩싸였다.


"여기서 만나네요."

"아, 안녕하세요. 유스호스텔에 돌아가는 길인가 봐요?"

"네.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무료 족욕'이란 간판을 보고 여기에 왔어요. 여기 어때요?"

"좋아요. 유스호스텔에서 가깝고 물도 좋고 무엇보다 한가해서 좋아요."

"제가 방해한 거 아녜요?"

"맞아요. 하지만 이미 방해했으니 끝까지 방해해도 달라질 건 없어요."

"그럼 저도 발 좀 담가 볼까요?"

"저 쪽에 보이는 바구니에서 타월 하 나 들고 와요. 나갈 때 사용해야 하니까."


 그녀는 무료로 제공되는 하얀 타월을 한 장 들고 내 옆으로 앉았다. 얼마간 흐른 침묵이 어색해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언가 할 말이 필요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맥주 마실래요?"

"네? 춥지 않아요? 시간도 아직 이르고."

"맥주 마시면 처음엔 차갑지만 점점 따뜻해져요. 그리고 맥주 마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요 뭘."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맥주는 어디서 사요?"

"제가 사 올게요. 어제 샀으니까 이 번엔 제가 살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족욕장 한편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맥 주 한 캔을 뽑아서 돌아온다. 온천수에 젖은 발이 나무 바닥 위로 발자국을 남겼다. 시원한 캔 맥주를 그녀에게 건네고 조금 전에 받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건빠이~(乾杯)!"

"건빠이(乾杯)."

"아, 진짜 기분 묘하네요. 뜨거운 온천수에 발 담그고 시원한 맥주 마시는 거."

"그렇죠? 전 그 느낌이 너무 좋아요."

"오늘은 뭐했어요?"

"매일 비슷하죠 뭐. 일 끝나고 산책하고 먹고 마시고. 특별할 건 없지만 지루하진 않아요. 미나씨는요?"

"전 유후인 시내 구경했어요. 킨린코도 가보고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비가 와서 그런지 한가하더라고요."

"나도 오늘 킨린코갔었는데."

"정말요?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차도 마시고 저 가이드도 해주고."

"그러게요. 근데 오늘 온다던 친구는 아직 안 왔나 봐요?"

"아~ 제 남자 친구요?"

"네? 남자 친구요?"

"네. 원래 남자 친구가 오늘 오려고 했는데 바빠서 올 수가 없다네요."

"그랬구나."

"어쩔 수 없죠."

"실망하지 말아요."

"실망은요 뭘. 이런 일 자주 있어요. 예상은 한 일이지만 혹시라도 그가 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두 명 예약을 한 건데…"

"남자 친구가 굉장히 바쁜가 봐요?"

"네. 스스로 바빠지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같은 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는데 한 번 연구실에 들어서면 좀처럼 나오질 않아요. 연구실에서 일하는 모습에 반해서 만나게 되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이 너무 미워진 게 웃기죠? 저흰 데이트도 연구실에서 한다니까요."

"보통 여자들 같으면 못 견딜 텐데. 그런 남자 친구."

"처음엔 실망도 많이 하고 미워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가끔씩 혼자 여행하는 걸 즐겨요. 그냥 아무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그렇게 기분 전환하고 돌아가면 그가 날 반겨주니까 큰 문제는 없어요."

"둘 다 이해심이 많은 것 같네요."

"이해심이 많은 건지 서로 에너지 소모를 피하는 건지 요즘은 사소한 말다툼도 안 해요. 우리 사이가 너무 건조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냥 이대로 서로 편하니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우리 관계가 이어지는 것 같아요."


 남자 친구라는 말에 이미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친한 친구가 위로라도 해 주듯 말은 했지만 사실 그 당황스러움과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실망하지 않았다던 그 녀 역시 실망감을 감추기는 힘들었는지 긴 한 숨을 허공에 내뱉고는 물속에 잠긴 발을 저어 물결을 만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발이 반짝였다. 킨린코의 물고기처럼…


"전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더 있을 거예요?"

"아뇨. 저도 돌아가서 좀 쉬다가 맛있는 저녁 먹어야죠."

"저녁식사는 남기지 말아요."

"그럼요. 벌써 배고픈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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