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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May 19. 2020

유후의 향기 01

由布の香り

아직 47분이나 남았다. 조금 먼저 도착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만나기로 한 곳의 맞은편 벤치에 앉아 귀를 감싸고 있는 헤드폰이 흘리는 음악을 들으며 담배를 입으로 가져간다. 긴장해서인지 입술이 말라붙어 있었지만 갈라지거나 피가 나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인파로 술렁이는 금요일 저녁 가로수길. 스쳐 지나가는 그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빨아들였던 연기를 길게 뱉어내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고 귓속에서 단지 잡음 내지는 누군가의 읊조림으로만 들리던 hortense ellis의 목소리가 음악으로써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경쾌한 레게 리듬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애절한 구애의 음색이 묻어났다. 어느덧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의 불을 죽이자 지나가던 한 여자가 내 옆에 선채로 담뱃불을 붙이고는 하루의 스트레스를 연기에 담아 날리듯 길게, 아주 길게 내뿜기 시작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그녀는 정장 차림으로 습관처럼 천박하게 담배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더러운 꼴을 다 경험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다. 타인의 흡연습관 때문에 내 설렘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기다릴까 생각해 보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나처럼 일찍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습관적으로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뿌리며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그 사이 담배 연기가 옷에 눌어붙어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닐까 하며 재킷에 코를 가까이 가져가 보기도 했지만 휴대폰 속의 숫자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휴대폰의 시계가 망가진 것은 아닐까 하며 버튼을 눌러 확인해 보자 보란 듯 분을 가리키는 숫자가 바뀌고 무안해진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의 음성이 들려오자 난 몇 초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조만간 한 번 만나서 커피 한 잔 하자는 기약 없는 말을 해버리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다시 헤드폰으로 귀를 감싸고 음악을 흘린다. 보통 한 곡에 3분에서 4분 정도니까 8곡을 듣고 맞은편의 약속 장소로 움직이기로 한다. 너무 많은 곡 중에서 무엇을 들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다가 무작위 선곡 버튼을 눌렀다. 때로는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어둡고 낮은 천장이 내게 아침인사를 건넨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몸을 일으킨다. 지하에 위치한 방의 천장은 내 키보다 낮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였다. 아침에 정신없이 일어나다가 눈물이 찡할 만큼 아픈 경험을 몇 차례 경험하고 나서야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서게 되었다. 6시 30분이 조금 지나고 있었고 나는 치약을 묻힌 칫솔을 들고 주방 옆에 있는 세면대로 향한다. 료 역시 방금 일어난 듯 부은 눈으로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좋은 아침"

"응, 좋은 아침이네. 오늘 아침밥은 몇 명?"

"7명인데 와쇼쿠(和食 일본식)로 준비할 거니까 금방 할 거야."


 보통 아침 식사 메뉴는 두 가지가 있는데 중년 이상의 일본 게스트가 많을 때에는 밥과 국 그리고 가벼운 반찬류가 포함된 일본식 메뉴가 제공되며 젊은 사람들이나 외국인 게스트가 많을 때에는 토스트와 샐러드, 주스 등이 포함된 서양식 메뉴가 제공된다. 미리 준비해 놓을 수 있는 일본식 메뉴에 비해 빵과 소시지 등을 구워야 하고 샐러드를 만들어야 하는 서양식 메뉴가 손이 많이 간다. 게다가 서양인들은 동양인들과 달리 아침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어찌나 천천히 먹는지 설거지를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연휴나 주말에는 이 곳에 머무를 수 있는 최대 인원, 25명 정도의 게스트가 머무르는데 그들의 아침식사로 서양식 메뉴를 준비할 때면 료와 토모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넓지 않은 주방을 이리저리 오가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에 비하면 일본식 아침식사 7인분을 준비하는 것은 소꿉놀이 수준이랄까? 가벼운 마음으로 양치질을 하고 주방으로 들어선다. 두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식사 준비를 하며 료 그리고 토모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유스호스텔을 운영하는 료와 토모미는 동갑내기 부부로 캐나다 여행을 하던 중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처음 만났을 당시 둘 다 일본에 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뜨겁고 드라마틱한 여행 중의 로맨스가 두 커플을 갈라놓았지만 그들은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고 젊은 그들 부부와 대화를 하는 것은 내게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일본어를 연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해서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이야기를 하려 했고 그들 역시 가깝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남자아이가 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영어도 모자람 없이 구사해서 대화중 내가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나올 때면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은 료가 게스트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어젯밤에 '킴'이란 여자가 예약을 했는데 한국사람이겠지? "

"글쎄... 한국 사람일 가능성이 높긴 하겠지."

"두 명인데 둘 다 '킴'이야"

"아, 그래? '킴'다음에 이름이 뭐라는데?"

"그냥 '킴'이라고만 했고 삼일 동안 머무를 거래. 어색한 일본어로 예약을 하긴 했는데 대화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어. 만약 일본어나 영어로 대화가 안되면 빈이 잘 좀 챙겨줘."

"응, 그럴게."

"유후인(由布院)이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졌나 보네. 요즘 한국 게스트가 자주 오는 거 보면."

"그러게 말이야. 난 여기 오기 전에 유후인이 유명한 온천지 인지도 모르고 왔는데."


 그랬다. 이 곳에 두 달을 머무르기로 했지만 유후인(由布院)이란 지명을 들어 본 적도 없었고 유후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디로든 떠나는 게 목적이었고 큐슈(九州)오이타현(大分県)의 어느 산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온천지라는 말에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 책상으로부터, 방으로부터, 집으로부터, 도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에.

 유후인 역이 있는 중심가에서 30분 정도 산 길을 오르면 료와 토모미가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이 나오는데 난 이 곳에서 일주일에 6일, 하루 5시간 정도 일을 하고 그들은 내게 하루 세끼 식사와 머무를 방을 제공했다. 일은 주로 식사 준비와 청소 등의 몸을 사용하는 단순 노동으로 복잡한 내 몸과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단순한 육체노동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일이 끝나면 주로 산책을 하거나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고 쉬는 날은 그들과 여행을 가거나 등산을 했다. 특별할 것 없지만 지루하지 않고 무엇보다 거의 스트레스가 없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 곳에 온 뒤로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습관처럼 마시던 술과도 멀어져 가벼워지는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동화 속의 마을 같은 이 곳, 유후인이 마음에 들었다. 


"빈, 미소시루(みそ汁 일본 된장국)는 금방 될 거니까 준비된 밥하고 다른 요리부터 서빙 부탁해."

"알았어. 두 테이블에 나눠서 준비하면 되는 거지?"

"응. 냉장고 앞 테이블에 3명 그리고 중앙에 4명."


 예상대로 아침식사 준비는 쉽게 끝났고 7시 30분이 되어 나는 복도에 설치된 마이크의 스위치를 켜고 아침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안내 방송을 한다. 게스트가 하나둘씩 식당으로 모여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고 지난밤 동안 비었던 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주방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한다. 보통 토모미와 두 아이들은 방에서, 나와 료는 주방에서 식사를 하는데 게스트에게 제공되는 메뉴처럼 여러 접시에 정성스레 나누어 담지는 않지만 음식은 거의 같았다. 몇 주 전부터 나는 천천히 먹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입으로 나를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왼손의 다섯 손가락에 몰려 가끔은 쥐가 날 때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자 어렵지 않게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적절한 식사 속도를 유지하게 되었다. 조금씩 느려지는 생활이 가져다주는 여유가 좋았다.


"잘 먹었어. 난 시키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식사 끝나면 토모미와 뒷정리 부탁해."

"응, 조심해서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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