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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Sep 18. 2020

유후의 향기 10

由布の香り

"여행 많이 다녀봤죠?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도시마다의 매력이 있지만 저한테는 프라하(praha)가 제일 매력적이었어요. 워낙 유명한 도시라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가 비슷하죠. 언덕 위에서 웅장하게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프라하성이나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까를교. 인형극, 보헤미안 크리스탈. 뭐 이런 것들. 하지만 저한테 프라하는 우 말레호 글레나(u maleho glena)에요."

"그게 뭐예요?"

"프라하에 있는 재즈바 이름이에요."

"유명한 재즈바인가 봐요. 저도 프라하에 있는 재즈바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유명인사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하더라고요."

"아니요. 그곳 하고는 다른 곳이에요. 글레나는 그리 크지도 않고 아니, 아주 작고 유명인사들 보다는 현지인들이나 저처럼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이 밤을 보내는 곳이에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할 것 같은 느낌인데요."

"그것도 멋지겠네요. 글레나는 2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펍(pub)이고 지하에 아주 작은 라이브홀이 있죠. 작은 바(bar)가 있고 테이블이 6개 정도 되려나… 매일 밤 9시에 라이브 연주가 시작되면 전 벨벳(velvet)을 마시면서 연주자들과 교감을 하죠. 미소 묻은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리듬에 맞춰 손가락을 놀리기도 하고. 그냥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 줄 알죠?"

"그럼요 알죠. 음악들을 때, 특히 라이브 들을 때 그러잖아요. 몸이 절로 움직이는 거. 근데 벨벳은 칵테일 이름인가요?"

"아뇨. 벨벳은 칵테일이 아니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체코 맥주 브랜드예요. 필스너우르켈(pilsner urguell)이나 부드바이져(budweiser)처럼 대중적인 맥주는 아니지만 맥주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 번 마셔볼 만해요. 잔을 살짝 기울여 맥주를 따르다가 잔이 가득 찰 때 즈음 잔을 세워서 폼(foam)으로 마무리를 하죠. 잔 안에 역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품이 잠잠해지면 윗부분에 크림이 소복하게 생기는데… 아, 갑자기 마시고 싶네. 하여간 체코 가면 꼭 찾아서 마셔봐요. 내가 무슨 말하는지 직접 느끼게 될 테니." 

"나도 가보고 싶다. 근데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까 유럽 가긴 정말 힘들어요. 휴가가 길어야 1주일인데 그 기간에 유럽 여행을 한다는 건 좀 무모하잖아요. 오고 가고 이틀 걸리고 나머지 5일 동안 뭘 해야 비행기표값이 아깝지 않을까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짧고 깊은 사랑에 빠지기."

"... 저도 그런 상상해봤어요. 길게는 못가도 혼자 여행을 다니는 편 이거든요. 그럴 때면 왠지 다시 사랑에 빠질 것 같고 설레고. 물론 실제로 그래 본 적은 없죠. 사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남자 친구한테 미안해요. 남자 친구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전 진짜 화날 것 같아요."

"상상 속에서까지 구속받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 설레임을 간직하고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그 설레임을 즐기다 보면 정말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쓸데없는 두려움이죠."

"그러면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되잖아요. 남자 친구가 있는데도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뭐랄까?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운명적인 사랑 아닐까요?"

"그렇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잖아요. 물론 감정이란 숨길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그러다 보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요.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이기에는 저도 너무 커버렸고요."

"미나씨가 좀 크긴 하죠"

"재미없어요."

"썰렁했나요?"

"몰라서 묻는 거 아니죠?"

"미안, 아마 제가 혼자라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일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되면 얘기해줘요.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요."

"그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나게 되면 알려줄게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녀가 내 운명적인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말했듯 그녀는 다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 상상 속의 설레임까지 구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맥주잔을 채우고 우린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음 여행지는 정해진 곳이 있어요?"

"아니요. 전 여행 다닐 때 계획을 세우고 이 곳 저곳을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죠. 무책임하고 게으른 것 같아도 저한테는 이게 여행이에요. 계획 세우느라 시간 보내고 스트레스받고 명소는 꼭 가봐야 된다는 생각에 쉴 새 없이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보고 나서야 내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알게 되고... 그런 여행은 생각하기도 싫어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시간과 돈의 제약이 있잖아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보고 느끼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요?"

"저도 이해하죠. 제 말은 제 여행 방식이 맞고 다른 사람들의 방식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여행이란 그런 의미라는 거예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계획 없이 여행을 하더라도 어떤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단지 사람들이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행하지 않을 뿐이죠. 그리고 저한테도 시간과 돈의 제약이 있어요. 시간보단 돈의 제약이 크지만…"

"빈씨는 저랑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고.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미나씨 통장에 돈 얼마 있어요?"

"네?"

"회사에서 월급 받으면 저축할 거 아녜요. 적금이나 보험 같은 것도 들고 나중에 결혼할 때 필요한 돈도 따로 모아놓고… 보통 그렇게 돈 관리하지 않나요?"

"그렇죠. 근데 갑자기 돈 얘기는 왜?"

"전 한 번도 저축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남들은 집 사고 차 사고 저축하는 돈으로 여행을 하거든요. 여행에서 돌아오면 생활을 해야 하니까 일을 해야 하는데 프리랜서라 정해진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통장은 비어있고. 중간에 취소되는 프로젝트는 흔하고. 디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클라이언트는 내게 디자인을 가르치려들고. 한 번은 살고 있던 집 보증금으로 여행 갔다가 돌아와서 살 던 집 근처의 사우나에서 6개월 동안 지낸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전 아직도 사우나에 안 가요. 그 냄새에 질려서. 어쩔 때는 정말 힘들고 짜증 나요. 흔히들 얘기하는 대기업에서 월급 받으며 살아가는 친구들이 부러워지기도 하고. 여행의 후유증 혹은 부작용이랄까?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가는 걸 보면 이런 생활이 제가 원하는 인생인 것 같아요. 제 말은 두 가지 다 장단점이 있고 모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대부분이 저와는 다른 쪽을 택하고 나서 저를 부러워한다는 거예요. 그들도 할 수 있는데 안 하면서 말이죠."

"내가 직접 해보기에는 두려운 거죠. 이미 누리고 있는 안정된 생활은 지루해져만 가고 일탈을 해 볼까도 생각해 보지만 너무 늦은 것 같고. 그러니까 그냥 부러워하는 거예요. 내가 못하는 걸 다른 누군가가 하고 있으니까 일종의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은 거죠. 근데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은 있어요?"

"한 번 있는데 돈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서 돈이 차곡차곡 쌓이더라고요. 근데 뭔가 허전하고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커 저만 가서 결국 3개월 다니다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어요. 어찌나 행복하고 자유롭던지. 그리고 깨달았죠. 난 직장 생활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그랬구나. 저희 회사에도 그런 사람 있어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 사이에 섞이지도 못하고 항상 공상에 빠져 있는 것 같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우리 회사 사장 아들이래요. 그 사람은 전 세계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어느 날 여행지에서 만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 거예요. 사랑이 깊어져서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했는데 여자가 미래를 위해서 여행은 그만하고 이제부터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라고 했대요. 직장 생활한 지 3년이 되는 날 청혼을 받아주겠다고. 결국 사장인 아버지도 불러들이지 못했던 아들을 여행지에서 만난 여자가 회사로 불러들인 거죠. 아마 지금 2년 좀 넘게 하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네요. 하지만 내가 그 남자라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자기가 정말 직장 생활을 필요로 하고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여자의 말 때문에, 그 여자와의 결혼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요?"

"저도 가끔씩 회사에서 그 사람 마주칠 때면 너무 불쌍해 보여요. 새장 속에 갇힌 새 같다고나 할까? 넓은 하늘을 날고 있어야 하는데 그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가다 보니 날갯짓하는 것 마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사랑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희생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이 멋져 보이기도 해요. 그리고 지금은 여행보다 일을 좋아한다니까요."

"난 멋진 사람이 아닌 것 같네요"

"하하하. 그래서 아직까지 여자 친구 못 찾은 거예요. 항상 자기 하고픈 대로만 하면 그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맞아요. 그래서 전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죠."

"농담이었는데…"

"괜찮아요. 사실인데요 뭐."

"빈씨도 좋은 사람 곧 만날 거예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진 다면서요."

"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제가 사랑을 간절히 바라진 않았나 봐요."

"주문을 걸어봐요."

"그래야겠어요."


 그랬던 것일까? 내가 정말 사랑을 간절히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난 아직 혼자인 걸까? 아니면 간절히 바랬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모르겠다. 


"내일 계획은 있어요?"

"아뇨. 아직."

"그럼 내일 자전거 같이 탈래요?"

"저랑 자전거 타면 흘러가는 대로 가야 되는데."

"한 번 해보죠 뭐."

"좋아요. 근데 내일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네."

"좋을 거예요."

"일기예보 봤어요?"

"아뇨. 주문을 걸었거든요. 내일 파란 하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미나 씨 벌써 마술사가 되셨네."

"네, 마술사가 된 기분이에요."

"그럼 내일 몇 시에 볼까요?"

"게으름 좀 부리다가 10시쯤 볼까요?"

"좋아요. 10시에 식당에서."

"내일을 위해 건배(乾杯)~"

"건배(乾杯)!"


 우린 몇 번째 인지 모를 맥주잔을 비우고 이자카야를 나왔다. 여전히 텅 빈 거리를 걸어 유스호스텔까지 오는 길은 멀었지만 빨리 도착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단지 그녀와 둘이서 밤거리를 걷는 게 좋았다. 하늘은 어느새 짙은 구름을 걷어내고 파아란 하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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