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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Sep 29. 2020

유후의 향기 12

由布の香り

 킨린코에서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즐긴 우리는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이미 붐비기 시작한 시내를 벗어나 유후인 와이너리를 향해 페달을 굴렸다. 서서히 뒤로 흘러가는 풍경과 기분 좋게 스치는 바람을 즐기며. 좁고 한가한 지방국도를 힘겹게 오르내리다 언덕가의 주택 앞에 잠시 멈췄다.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유후인은 다른 모습이네요. 그냥 한적한 시골 마을 같아요."

"유후인은 보는 위치에 따라 여러 표정이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어디서 보더라도 평화롭다는 거예요."

"가끔은 평화롭다는 말이 정말 어색해요. 좋은 뜻이고 편안하게 느껴지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평화에…"

"그런가 봐요."


 우린 내리막길을 지나고 간이역의 철길을 건너 유후인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자전거를 가지런히 세워두고 2층에 위치한 와인숍에서 시음을 한다. 오늘도 백발의 소믈리에는 인자한 얼굴로 손님을 맞는다. 


"포도밭은 어디예요?"

"재밌는 건 이 곳 와이너리에는 포도밭이 없다는 거예요. 근처 어디에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가본 적은 없어요."

"그럼 와이너리가 아니잖아요."

"제 생각에는 유후인 시내와 적당히 떨어진 한가한 곳에 관광객을 상대로 이 건물을 짓고 와이너리라고 이름을 붙인 것 같아요."

"전 넓게 펼쳐진 포도밭을 상상했는데."

"저도 처음엔 그랬지만 적어도 와인 시음이 가능하고 맛있는 치즈나 햄도 살 수 있으니까 가끔씩 오게 되더라고요. 자전거 타고 오기에 적당한 거리이기도 하고."

"내가 첫 날밤에 먹은 치즈와 햄도 여기서 샀구나."

"네. 그러고 보니 재밌네요. 유후인에서 도착해서 처음 먹은 게 이 곳 치즈와 햄이라니."

"이 와이너리가 저와 인연이 있나 봐요."

"색다른 인연이네요. 와인은 어때요, 맛 괜찮아요?"

"상쾌한데요. 역시 여름엔 적당히 산도가 있는 화이트 와인이 어울리는 것 같아요."

"치즈도 먹어봐요. 유후인에서 생산한 우유로 만든 건데 처음엔 심심한 맛이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느껴져요. 유후인은 우유를 많이 생산하진 않지만 좋은 품질로 유명하거든요."

"좋을 수밖에 없겠어요. 이렇게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나온 거니까."

"환경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네. 우린 환경 속에서 살아가니까요."

"본질과 본능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환경에 의해 어느 정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도 유후인에 온 뒤로 많이 변하고 있으니까."

"평화롭고 여유롭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기분 좋게."

"그럼 이 곳에 와서 살면 되겠네요."

"그런 생각을 안 해본건 아닌데, 힘들고 지칠 때 이렇게 와서 지낼 수 있는 휴식처로 간직하고 싶어요."

"그게 더 좋겠다. 여행과 일상은 다르니까."

"많이 다르죠. 미나씨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디에 살고 싶어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난 그리스나 스페인의 해안도시 어딘가에. 가보지도 않았지만 언젠가 그곳에 살고 있을 것 같아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발코니에서 바람맞으며 향기로운 차나 와인을 즐기다가 잠시 낮잠에 빠져들기도 하고…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거죠."

"꿈같은 얘기네요. 하지만 일상이 돼버리면 지루해지지 않을까요?"

"그러면 다시 유후인에 오죠 뭐."

"하하하."


 우린 햄과 치즈를 사 가지고 유후인 와이너리를 나섰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다시 페달을 굴린다. 파아란 하늘 아래 자리 잡은 산등성이와 양 옆으로 펼쳐진 논밭을 가르며. 


"저 멀리 보이는 가장 높은 산이 유후다케(由布岳 1584m)에요."

"올라가 봤어요?"

"한 번 정상에 오른 적이 있어요. 료하고 토모미하고 시키 그리고 나."

"시키?"

"유스호스텔에 조그만 여자아이 있잖아요."

"그 딸아이도 정상까지 올랐어요?"

"네. 저도 7살짜리 여자아이에겐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암벽등반까지 하며 정상에 함께 올랐어요.”

"그 아이 대단하네요."

"시키도 그 날 유후다케를 오른 건 처음이었는데 힘겹게 정상에 오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거예요. 감정이 폭발한 거죠.”  

"어머, 그 순간이 굉장히 벅찼나 보네요. 정상을 밟은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도 함께 울 뻔했다니까요.”

"아, 너무 좋았겠다. 자연도, 그 감정도.”

"등산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때는 너무 좋았어요. 조금씩, 조금씩 작아져가는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올라있더라고요. 공기는 얼마나 상쾌하던지 몸속의 노폐물이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랄까. 바람이 세차게 부는 정상에 서서 동화처럼 펼쳐진 유후인 풍경을 내려다봤어요. 그리곤 다시 암벽을 타고 내려와 바람이 덜 부는 바위 위에 모여 함께 도시락을 먹었죠."

"도시락 싸갔어요?"

"아뇨, 그냥 산에 오르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각자 먹고 싶은 도시락을 사 가지고 갔어요.”

"김밥 싸갔었으면 더 맛있었겠다."

"물론 그랬겠지만 거기선 뭘 먹어도 맛있을 거 같아요.”

"만약에 다시 유후인에 올 기회가 생기면 저도 꼭 유후다케에 가보고 싶네요.  저는 꼭 김밥 싸가지고 갈 거예요. 마요네즈에 버무린 캔참치와 오이를 듬뿍 넣은 김밥.”

"김밥 먹으려고 등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하하하, 그럼 안 되나요?"

"안될 거 없죠. 미나씨가 김밥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유후다케의 정상을 밟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김밥을 맛있게 먹는 방법 치고는 많이 힘들겠지만 무조건 맛있겠네요.”

"그렇죠? 생각만 해도 너무 맛있네요."

"그러게요. 특히 참치 김밥이라면.”

"참치 김밥 좋아해요?”

"네, 김밥 중에 제일 좋아해요.”

"참치를 마요네즈에 버무릴 때 와사비를 좀 넣으면 훨씬 맛있는 거 알아요?”

"잘 아시네. 와사비가 느끼한 맛도 잡아주고 맛도 풍부하게 해 주죠.” 

"먹는 얘기 하다 보니 갑자기 배고파지는데요. 우리 밥은 언제 먹어요?”

"배고프면 먹어야죠. 12시가 다 되어가니 슬슬 점심 먹으러 갈까요?”

"좋아요. 근데 뭐먹죠?"

"참치김밥!”

"네?”

"농담이에요.”

"참치김밥은 유후다케 정상에서 먹을 거란 말이에요.”

"그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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