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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Oct 20. 2020

유후의 향기 13

由布の香り

 갑자기 몰려온 허기에 우린 나름 힘차게 페달을 굴렸다. 아무리 봐도 질릴 것 같지 않은 풍경을 뒤로한 채. 유후인의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한 식당에 멈춰 섰다. 


"식당 이름이 사토우(サトウ)?"

"아뇨. 일본어에는 장음이 있어서 사토우라고 읽지 않고 사토-라고 길게 발음해요. 예를 들어 선생님이 뭔지 알죠, 일본어로?

"네. 센세이(先生 せんせい)."

"그것도 장음이라 센세이가 아니라 센세-라고 길게 발음하는 거예요."

"아…1년 넘게 일본어 배웠는데 몰랐네."

"가장 흔히들 하는 실수죠."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어요?"

"헤어진 여자 친구가 일본 사람이에요. 긴 여행 중에 그녀를 만났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싫어서 무작정 그녀가 살고 있던 도쿄로 갔어요. 서울에서 하던 일 다 접고 일본어 학원에서 기본적인 문법만 배우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살면서 배웠죠."

"여자 친구가 보고 싶어서 도쿄로 이사를 간 거예요?"

"그런 셈이죠. 그곳에서 내 직업은 전업주부였지만 너무 행복했어요."

"전업주부?"

"네. 워킹비자가 없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그녀의 집에 머무르면서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그녀가 출근하고 나면 한가한 시간을 보냈죠. 공원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지금 하고 있는 생활하고 비슷하네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렇네요. 그래도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으니까…"

"얼마나 있었는데요, 도쿄에는?"

"3개월."

"겨우?"

"네. 그녀가 갑자기 긴 여행을 떠났거든요. 처음엔 가지 말라고 함께 있자고 했는데 곧 깨달았어요.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잡아도 떠날 사람은 언젠가 떠나니까… 그다음엔?"

"그녀는 떠나고 전 서울로 돌아왔죠. 그게 2년 전이에요."

"그때 헤어진 거구나."

"글쎄요. 서로 헤어지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저한테는 사랑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 뒤로 만난 적도 없고. 무엇보다 좋은 추억은 있지만 그녀가 더 이상 그립거나 보고 싶지 않거든요."

"혹시 그 친구는 아직도 영빈 씨 사랑하는 거 아녜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쉬운 사랑은 없나 봐요."

"... 주문할까요?"

"아, 네. 뭐가 맛있을까?"

"전 점심메뉴로 나오는 도리텐정식(鳥天定食)만 먹어봤는데 괜찮았어요."

"뭔가 닭으로 만든 건가 봐요?"

"네, 쉽게 얘기하면 닭튀김정식이에요. 보통 일본에서 육류는 가라게(空揚げ) 가루를 묻혀서 튀기고 야채나 해산물은 템푸라가루로 튀김옷을 만드는데 이 지역에서는 닭에 템푸라가루를 발라 튀기거든요."

"닭튀김이네요. 후라이드치킨.”

"일반 닭튀김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닭을 튀겼다는 점에선 비슷하죠.”

"튀긴 닭이 맛이 없을 순 없죠. 전 그거 먹어볼래요."


 난 사토-에서 그녀와 함께 도리텐정식을 먹었다. 3번째 먹는 같은 메뉴였지만 질리지 않았다. 잘 튀겨진 닭고기와 상큼한 샐러드, 흰쌀밥과 미소시루 그리고 부드러운 계란찜. 이 모든 것이 조그만 쟁반 위에 보기 좋게 펼쳐져 맛을 보기도 전에 탁월한 메뉴 선택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그녀 역시 음식이 테이블에 놓이자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메모리카드에 저장된 사진은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보여 그녀의 여행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와 함께 먹었다는 것도 기억할까? 기억하겠지. 내 어색한 표정이 담긴 사진을 지우지 않는다면. 


 무엇부터 맛을 볼지 망설이지만 역시 도리텐을 먼저 한 입 베어 문다. 아무리 훌륭해도 나머진 조연이니까. 어렸을 때에는 주메뉴나 좋아하는 음식을 아껴두었다 항상 마지막에 먹곤 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되었다. 조급한 마음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불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체험한 이후로는 항상 좋을 걸 먼저 취하게 되었다. 아껴두었다 똥이 되는 경우도 여러 번 겪어봤기에. 주연에 대한 나의 예의이기도 하고. 하여간 오이타의 특산물, 유즈코쇼-(柚子こしょう 유자 고추절임)를 곁들인 도리텐은 기본적으로 튀김이지만 일반적인 튀김에 비해 기름기가 적어 덜 느끼하고 먹고 나서 속이 거북하지도 않다. 바삭한 튀김옷을 입은 촉촉한 닭고기가 향기로운 유자 향기를 품은 고추절임과 입안에서 만난다. 잠시 잊고 있던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도리텐의 맛에 흠뻑 반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잠시 훔쳐보다가 그녀가 먹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우리 앞에 놓여진 음식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점심식사를 즐겼다. 


 "여기 정말 맛있네요. 평소에는 회사 점심시간에 쫓겨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먹기 힘든데, 정말 오랜만이에요. 점심식사를 이렇게 즐기는 거."

"여유롭게 먹은 것 치고는 우리 둘 다 너무 빨리 먹어버렸지만 맛있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래요? 전 평소에 비해 천천히 먹은 건데.”

"평소에는 얼마나 빨리 드시길래?"

"직장생활을 하면 점심시간이 밥 먹는 시간이라기 보단 쉬는 시간이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쉬고 싶은 시간이죠. 그래서 김밥이나 샌드위치 등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남는 시간에 충전을 하는 거죠. 퇴근시간까지 버틸 수 있도록.” 

"다른 이야기지만 갑자기 학창 시절 점심시간이 생각나네요."

"오래전 이야기네요.”

"그렇죠. 그때는 친구들과 무얼 먹어도 맛있고 즐거웠던 것 같아요. 최대한 빨리 먹고 운동장에 나가서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그러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이 돌아오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는데."

"영빈 씨는 모범생은 아니었나 봐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바라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남들한테 피해 주지 않고 혼자 즐기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그런 생활이 정말 바람직한 거죠. 어렸을 때 소위 말하는 모범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모범을 보여주기는 커녕 고위 공직자가 되어 혹은 정치인이 되어 나쁜 짓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자기가 가진 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혹은 악용하는 거죠.” 

"맛있는 점심 먹고 불쾌한 이야기를 하려니.”

"맞아요. 그런 얘기는 그만하죠. 소화 안 되겠어요.”

"혹시 여기 디저트도 있나요?”

"여기도 있긴 한데 조금만 걸어가면 조그만 놀이터 앞에 조그만 아이스크림집이 있어요. 한국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라 불리는 아이스크림 있죠?”

"네. 저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그럼 거기로 갈까요?”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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